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도행전 15장입니다. 읽기는 1절과 2절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 및 그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엄청나게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유대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이야기하니까 이방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저건 무슨 얘기야?”라고 생각하며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상황을 바라보면서 2절에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 및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사도와 장로들,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모여서 이 문제를 명확하게 결정짓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을 얻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룰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을 얻습니다.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엉뚱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며,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지고,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떠나게 됩니다.
솔직히 교회에 처음 나오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더 쉽습니다. 교회를 나온 사람이 상처받고 떠난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런 사람이 없기 위해서는 교회가 교회다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첫째,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떤 분들은 전도하는 것을 망설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교회의 문턱이 높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처음 믿는 사람들을 괜히 데려왔다가 교회에서 적응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은근히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잘하지만,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오면 적응 잘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전도를 망설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솔직히 힘들어요.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 괴로울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적응하기 힘든 부분들이 은근히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예수님은 좋아하지만,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문제는 물을 마시려면 컵이나 그릇이 있어야 마실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물이고 교회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릇이 잘못되어 복음 전파가 잘 안 되고, 교회에서 시험받고 괴로워하는 문제들이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문화적 장벽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에 백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사는데, 대부분 미국 교회를 다니지 않고 우리끼리만 교회를 나옵니다. 이유는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오바마 대통령도 흑인 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떤 문화적 차이 때문입니다. 선교학자 도날드 맥가브란 박사는 사람들이 예수께로 올 때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까지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문화적 장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문화적 장벽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은 찬양을 부를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부릅니다. 젊은이들 모이는 교회에 가면 찬양 시작하면 일어나라고 하지 않아도 다 일어나서 찬양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세대가 섞여 있다 보니,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찬양하는 시간이 더 길어요. 나이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박수만 쳐도 나이대가 보입니다. 예전에 청년부 사역을 할 때, 저는 30대 중반밖에 안 되었지만, 청년들은 20대였어요. 제가 박수를 치면 청년들이 저에게 “목사님, 박수 치는 것만 해도 나이가 든 게 보여요”라고 하더군요. 박수 치는 것만 봐도 나이대가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서도 박수 치십시오 하면 어떤 사람은 앞에 치고, 어떤 사람은 뒤에 칩니다. 그것이 나이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 사역자님께 박자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습니다. 같은 박자에 박수 치라고요. 가끔은 박자도 틀리기도 하니, 누가 나이가 많은지, 누가 젊은지 보이기도 합니다.
문화적 장벽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만, 그걸 너무 고집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뉴욕의 세속화된 도시에 리디머 처치를 개척한 팀 켈러 목사님은 교회를 처음 창립할 때, 믿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신자를 위해 교회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화적 장벽을 낮춰 믿지 않는 분들이 와서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혹시 이런 것들 때문에 처음 믿는 분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괴롭게 하는 것들 중 하나는 우리끼리만 쓰는 언어입니다. 우리가 그런 언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교회에서 통용되는 은어나 전문 용어를 사용할 때 교회 밖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할례를 폭경 수술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알아듣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입니다. 굳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셨다고 표현하는 대신, 내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았다는 표현도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피로 씻는다는 말이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용서받았다고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차이를 두고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과장을 많이 합니다. 교회 출석 인원을 말할 때,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 과장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불신자보다 깨끗하다고 해서 얼마나 더 깨끗하겠습니까? 우리가 더 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과장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나의 신앙은 분명해야 하지만,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지만, 사람을 높이지 않고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처음 나온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며,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자유함을 아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에게 굴레를 씌우고,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뭘 해야 한다고 하면서 속박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때 교회는 답답해지고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매지 못한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신앙생활에는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멍에를 주면서 속박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그런 모습이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조차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속박하지 않으실까?” “예수 믿는 게 답답해요.”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고, 잔소리하시는 것 같아요.” “나를 얽매이려고 하시는 하나님 같아요.”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 생각 속에 살면 전도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은 답답해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게 저런 걸까?”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구원을 내세워 속박을 많이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많고, 거룩하다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많을수록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자유를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분들조차도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가 누굴 만나면 경직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저를 보면 놀라서 맥주를 숨기려고 합니다. 바깥에서 담배 피다가 저를 만나면 담배를 숨기고, TV를 보다가도 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절대로 여러분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을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목사만 보더라도 경직되고, 목사가 사람을 속박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신앙생활이 어떻게 즐겁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초의 공동체를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그들을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종들에게 자유를 주셔서 새로운 땅을 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세리로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남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더 넓은 것을 품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녀가 목사가 된다고 하면 반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유 중 하나가 돈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목사가 되면 좁고 답답한 인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면서 생각도 못 했던 많은 나라를 가보게 되었고,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좁은 분이 아니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속박하는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면 여성들이 차별을 극복하게 되고, 꿈을 꾸게 됩니다. 한 나라가 믿음을 가지게 되면 미신과 무지와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됩니다. 물론, 발전하면서 세속화되는 경향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이 속박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누가 누구를 속박합니까? 하나님이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이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법을 만들어 속박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일주일의 하루를 안식하라고, 참 쉼을 누리라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규례를 만들어 안식일을 지키는 법을 만들고, 사람을 속박합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나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를 속박하면서 신앙생활이 힘들고, 하나님이 나를 속박한다고 착각하며, 예수 믿는 재미와 기쁨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내 생각대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도 인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속박하는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보통 아버지들은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아버지는 그냥 쫓아가서 아들을 허그하고, 잔치를 열어줍니다. 그게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자기 스스로를 속박하기 때문에, 아버지도 자신을 속박하는 아버지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가늠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왔을 때, 사람들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많이 정죄하고, 나를 속박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쉼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저는 우리 성도들이 예수 믿기 때문에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이 여러분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우리가 자유로워야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느낄 것입니다. 내가 나를 속박하잖아요. 그럼 나도 모르게 처음 예수 믿는 사람에게 그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 사람을 속박하고, 그 사람을 정죄하며 예수 믿기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한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유함을 아는 성도들이 많이 모인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간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면에서냐면,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 사도 바울이 나서서 갑자기 이방인의 편에 서서 말해요. 7절에 보니까, 많은 논의가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 나를 택하셨다. 이방인을 위해서 나를 택하셨다는 거예요. 어떤 사건인지 여러분 아시죠? 부정한 것을 보여주시면서 먹으라고 자꾸 얘기를 하신 거예요. 주님, 저 못 먹어요. 먹어 본 적도 없고, 먹으면 안 돼요. 야, 내가 먹으라는데 뭘! 그게 뭘 상징하냐면 바로 이방인을 상징하는 거거든요.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게 내 뜻이야. 그들도 예수를 믿는 게 내 뜻이야. 그 성령님께서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8절에,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는 게 맞고, 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맞다고 베드로가 변화된 거예요. 그런데 원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 보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받았으니, 이는 그가 책망받을 일이 있음이라. 무슨 얘기냐면, 이방인들과 밥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자리를 피한 거예요. 왜요?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뭐라 그럴까 봐. 그러니까 바울이 사도가 그럽니까? 이게 베드로의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변화된 거죠. 이제는 이방인들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고 그들을 품는 사람이 된 거예요.
베드로도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했어요. 솔직히 베드로는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 자기 삶에 얽매인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제자로 쫓아다녔지만 그의 시선이 넓어지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를 세 번 부인한 거예요. 그의 시선은 아직까지도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의 시선이 넓어진 거예요. 이제 자기에서 내 민족, 내 가족, 내 주변 사람들로 시선이 넓어진 거예요.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베드로는 부정한 것을 먹으라는 환상을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 거예요. 이제는 이방인들까지도 품는 사람이 된 거예요. 그게 성령의 역사예요.
우리 교회가 성교적 교회를 향해 서라고 계속 말하는데, 성교적 교인이 누구냐면 바로 이 마음이 넓어진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성령님의 역사는 나의 관심사와 사랑의 마음을 넓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를 품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예요.
에베소서 4장 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어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면, 하나 되게 하는 거예요. 나와 우리 가족이 하나, 나와 우리 교인들이 하나 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게 더 넓어져서 나와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람들까지도 품게 되는 거예요. 성령님은 그 나라도 내가 품게 하고,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하게 하시는 분이에요. 성령님은 나의 관계와 사랑의 폭을 지금도 넓히고 계시는 거예요.
성령님을 사모하면서, 성령님께서 나의 관계와 사랑의 폭을 넓히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깨달음을 가진 성도들로 넘치길 원해요.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새 가족이 와도 걱정 안 해요. 왜냐하면, 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도하라고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 성령님께서 이미 그런 교회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입니다. 정말 교회의 모습은 정말 많은 잔소리를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몇 가지만 얘기하자면, 나 때문에 다른 분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를 원해요.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내가 너무 과장되게 허풍을 떨기 때문에,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높이면서 쳐주지 않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정말 예수 믿는 자유함이 뭔지를 아는 성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주님 주신 자유함으로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 때문에 그 은혜 때문에 주님을 제대로 더 섬기는 그런 성도들이 되길 원해요.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내 관계의 폭을 넓혀가며,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모르는 사람마저도 품을 줄 알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나도 그렇게 간증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