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3장입니다. 읽기는 38절과 39절을 다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것이라. 아멘.”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13장을 읽었는데요, 사도행전 13장은 사도 바울이 선교지에 가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 설교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읽은 38절과 39절 안에 그 주제가 있습니다. 뭐냐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어라고 써 있죠? 이 사람이 누구냐,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제예요. 사도 바울은 설교하면서 그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입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하는 이유, 전도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어요. 바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힘입기를 원한 거죠. 그래서 39절에 또 얘기해요.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라.” 예수님을 힘입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 때문에 힘이 나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힘이 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예수님 때문에 힘이 나십니까? 아멘! 예, 오늘 설교 제목이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 그것도 예수님을 힘입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건데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 힘입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 때문에 힘이 나세요? 예, 그게 첫 번째 포인트예요. 언제 예수님 때문에 힘이 나십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설교를 하고 있거든요. 설교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높이는 게 설교요, 그 설교는 또 다른 찬양이에요. 찬양이다, 그죠? 우리는 이 첫 번째 포인트는 찬양을 통해서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새로운 약을 투약하기 위해 지난주에 휴스턴에 있었어요. 원래는 약을 투약하고 상황을 보고, 그 다음 날 상황을 보고 오려는 게 계획이었어요. 월요일에 가면 화요일이나 늦어도 수요일에 달라스로 오는 것이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약을 할 때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해서, 간이 안 좋든가, 결과가 안 좋든가, 몸이 벌벌 떠는 발작을 하든가, 이런 것들 때문에 의사가 집에 보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할 수 없이 병원에 있었어요. 그리고 지난주에도 또 투약을 했는데, 이번엔 좀 빨리 가겠지 했는데 또 여러 가지 합병증이 있어서 목요일까지 또 있었어요. 그 2주를 병원에 있고 싶지 않은데 목요일까지 있다 보니까 사람이 지치고 마음이 다운되고 막 그러더라고요. 병원이요, 병원 음식이 진짜 맛이 없어요. 병원 음식이 진짜 맛이 없고, 자고 있으면 계속 깨워요, 뭐 한다고. 그리고 피는 얼마나 많이 뽑아 가는지 제 몸에 그렇게 피가 많이 형성되는지 처음 알았어요. 올 때마다 열 몇 개씩 뽑아 가거든요. 그런데 그게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씩 하루에 세 번 정도 이렇게 막 피를 계속 뽑아 가니까, 제 마음이 다운되고 지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럴 때 뭘로 힘을 얻는지 아세요? 저는 제 전화기에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들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들어 있어요. 우리 애는 아빠가 옛날 거 아니야 뭐 이렇게 틀면 그러는데, 찬송이 좋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지나면서. 그런데 이 찬송은 제가 간증할 수 있는 찬송들이에요. 간증할 수 있는 그런 찬송들인데, 찬송을 들으면 힘이 나요. 제가 몇 가지 소개하자면,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좋거든” 이게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에요. 제가 이 찬송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냐면, 저는 자격이 없는데 죄인인데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을 때, 그 은혜가 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서 신학교 다니면서 그냥 예수만 생각하면 너무 좋았어요. 그러니까 이 찬송이 저한테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됐던 거예요. 가사가 그거예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야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왜 그렇게 좋으냐, 주님 사랑 때문에 그렇거든요. 네, 그게 4절이에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랑만 그 사랑 알도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저만 사랑하는 것 같았어요. 진짜 저만. 그러니까 이 가사가 “내가 주님과 나의 사랑을 아무도 몰라, 나만 알아 그 사랑을”.
그리고 5절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주님께 영광 돌리며 평생 영광 돌리며 살게 해주세요라는 그런 가사가 있어요. 5절의 가사는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입니다. 지금도 힘이 나지만, 또 은혜가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때로는 잘 안 오는데 이상하게 찬양을 부르면 그런 순간들이 찾아와요. “주님, 평생 제가 주님 주신 기쁨 속에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게 해주세요”라는 찬양인데,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찬양이에요. 그리고 또 제 전화기에 있는 찬양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에요. 이 찬양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실 때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할 때마다 저는 이 찬양이 생각나고 즐겨 부르는 찬송이에요. 그렇죠, “저 장미꽃 위에 있을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들리는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정말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기쁨은 아무도 이해 못하는 그런 찬양이죠. 그런데 이 찬양이 3절에 가서는 분위기가 좀 바뀌어요.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너무 좋은 것을 누리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밤이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하신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너무 좋은데, 저를 세상에 보내신다며 세상에서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이 찬양이 저에게 굉장히 힘이 되는 부분이에요. 이 찬양의 영어 버전이 정말 좋아요. 영어로는 “Come” 여기부터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인데, 너무너무 좋아요.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너 내 거야” 영어 번역에서는 “I am His” 하나님이 “너 내 거야”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힘이 안 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다음에 나오는 찬양이 있어요. 하나님과 맺은 그 관계는 알 사람이 없다는 찬양이죠. 나만 아는 비밀을 가진 그 찬양을 들으면서 정말 힘이 나는 것을 경험하게 돼요. 원래는 제가 설교 준비하면서 찬송을 하나 더 부르기로 했는데, 시간이 안 돼요. 우리가 성찬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요. 제 콘서트도 아니고요. 그런데 제가 간증이 있는 찬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는데 40분밖에 안 걸려요. 그래서 제가 안타깝게 느끼는 게, 내가 평생 예수를 믿고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의 반을 목사로 살았는데, 이렇게 간증할 수 있는 찬송이 많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걸 보면서, 이렇게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 이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예수를 빨리 믿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예수를 빨리 믿으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힘들고 쓰러질 것 같고 어려울 때가 있죠. 바로 이 찬양의 힘으로 내가 일어서는 건데, 찬양이 이거밖에 없으면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그래서 많은 여러분이 간증이 있는 찬양을 많이 가지고, 힘들고 어려울 때 정말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찬양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을 통해서 힘이 나요. 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 수요예배 설교를 잘 들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제 치료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수요예배 설교는 저를 향한 설교였어요. 궁금하시면 한번 들어보세요. 그 설교 내용이 뭐냐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흔들리기 시작해요. 그 신앙 좋은 세례 요한이 흔들리기 시작해요.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봐요. “예수님, 당신이 진짜 오실 메시아 맞으세요?”라고 세례 요한이 물어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을 보면서 저를 보는 것 같았거든요. 어떻게 보면, 흔들리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내 스스로 안타까운 거예요. 세례 요한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그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흔들림을 보면서 뭐라고 정의해 주시는 거냐면, “세례 요한은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정의를 내리세요. 세례 요한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세례 요한의 신앙이 흔들린 건 아니야라고 주님께서 정확히 얘기해 주시는 것을 보면서, “맞아, 나도 그래. 내가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방법을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내가 예수를 안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고 그분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야. 내 신앙이 흔들린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 있는 것뿐이야.”
하나님께서 제가 설교하면서 저에게 말씀을 주시는 걸 보면서 힘을 얻은 적이 있어요. 혹시 여러분들도 비슷한 모습이 있다면 한번 들어보세요. 30분 설교로 제가 어떻게 다 하겠어요, 지금. 그런데 그런 내용이었어요.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어요. 저는 성도들이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기도 제목이나 이런 걸 보면서, “아, 이분 참 힘들겠구나, 어렵겠구나” 하는 분들이 있으면 설교를 하면서 그분을 약간 이렇게 얼굴을 봐요.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을 보면, 걱정이 안 돼요. “아, 저분은 흔들리지 않겠구나.” 말씀은 힘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겠구나. 그런데 그 삶의 무게 때문에 지치고 힘들어서 눈을 감고 계신지, 졸고 계신지 잘 모르지만, 그런 표정을 보면 제가 걱정이 돼요. 말씀 속에서 힘을 얻어야 되는데,
오늘 본문이 원래 사도행전 13장, 14장이었어요. 그런데 14장에 보면 앉은뱅이가 나와요.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하는데, 여러 사람들 중에 앉은뱅이가 있었던 거예요. 바울이 설교를 쭉 하다가 갑자기 앉은뱅이에게 주목해요. 9절에 보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본 거예요. 설교를 하다가 어느 한 사람에게 바울이 꽂힌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구나라고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설교하는 사람은 알아요. 설교하는 사람은 말씀을 듣는 자세와 표정을 보면 아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알아본 거예요. “이 사람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갑자기 설교하다가 한 사람에게 얘기해요. “일어나!” 앉은뱅이에게 얘기하는 거예요. “일어나!” 그런데 이게 진짜 놀라운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 상황 속에 들어가 보면, 이게 왜 놀라운지 알 수 있어요. 이 앉은뱅이는 평생 걸어본 적이 없어요.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일어나”라고 얘기해요. 여러분 같으면 아무 말 안 하고 일어날 것 같아요? 보통 사람은 “어떻게 일어나요? 왜냐하면 일어나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반응을 보였을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요. 이게 왜 그런 줄 아세요? 이게 설교에 빠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하나님 말씀에 빠져 있다 보면, 하나님 말씀에 빠져서 듣다 보면, 하나님께서 뭘 하라고 하시는 순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순종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말씀에 빠진 사람이에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하나님 말씀 앞에서 역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 말씀에 빠져 있는 사람이거든요. 전 여러분들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험한 세상에서 걱정과 근심이 많은 세상 속에서, 주일마다 주의 말씀 앞에 나올 때 말씀 때문에 힘을 얻고 다시 한번 더 일어설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역사의 경험 속에 들어가는 그러한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 때문에 힘이 나요라고 간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힘이 나는데, 언제냐면 십자가를 바라볼 때예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대한 얘기를 해요. 38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며” 여기 보면 죄사함에 대한 얘기를 하죠. 우리는 뭐 때문에 죄사함을 얻어요? 바로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죄사함을 얻는 거예요. 39절에 또 “모세의 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 우리는 뭐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어요? 바로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언제 다운되고 언제 힘이 빠지냐? 사탄이 계속해서 우리 귀에 대고 이렇게 얘기할 때 “너 같은 게 무슨 하나님의 자녀야? 너는 천국 못 가. 너 같은 죄짓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 가?” 이렇게. 욱하고 성격 하나 제대로 컨트롤도 못 하고, 할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사탄이 계속해서 우리를 정죄할 때, 우리는 흔들리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묵상하고, 제대로 믿게 되면 우리는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돼요.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묵상하게 되면 죄사함의 확신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신 은혜고,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힘을 얻게 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참 재미있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누군지 아세요? 사도 바울이 그 사람들에 대해 27절에서 얘기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 중에 특히 누구냐면, 예수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리새인들이에요. 무슨 얘기냐면, 성경을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얘기해요. 여러분, 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성경을 달달 외우면서도, 구약의 성경을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그 이유는 자기들이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자기는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오히려 못 박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 속에 들어가는지 아세요? 어떻게 바라보는 사람이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줄 아세요? 내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에요. 내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아는 거예요.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십자가는 그것이 은혜로 다가와요.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바로 그것은 주님의 사랑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돼요. 여러분, 왜 그 높으신 주님께서, 거룩하신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거들떠도 안 보실 거예요? 원래는 세상으로 말하면 거들떠도 안 볼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걸까요? 그것은 은혜 아니면 설명이 안 돼요. 그것은 사랑 아니면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그 사랑과 은혜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주님 앞에 죄인된 모습으로 나올 때,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돼요. 그래서 모튼 켈시라는 기독교 심리학자는 그런 얘기를 해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죄의식이 필요하다고.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속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보게 되는 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볼 수밖에 없어요. 보혈을 우리는 그냥 피라고 얘기하지 않죠. 그리스도의 피라고 얘기하지 않고 보혈이라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이 피처럼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베드로전서 1장 19절에 그렇게 표현하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다.” 그냥 피가 아니라 보배로운 피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몸에는 끝없이 피가 생성돼요. 그리고 정말 엄청나게 많은 피가 우리 몸 안에 흐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찬식 때 그 피를 마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는 더럽고 추한 모든 죄악된 것이 다 씻겨나가는 거예요. 그 보혈 때문에, 그 귀한 피 때문에, 우리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바로 그 보혈 때문에 에베소서 2장 13절에 보면, 이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하나님과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없애버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한 몸이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이유가 뭐냐면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이다라는 거예요. 이 보혈의 은혜를 우리가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죄악된 이 세상 속에서 힘이 나고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지길 원합니다.
세 번째는 바로 부활 때문이에요. 부활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설교의 클라이맥스에서 그 얘기를 해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30절에 보면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는데, 이 부활이 우리에게도 왜 중요하냐 하면, 그 이유는 33절에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신 것처럼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로 끝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가 부활의 약속을 받았어요. 우리도 부활한다는 얘기예요. 우리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특별히 제가 항상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그 말씀을 드리죠. 정말 우리 육신이 죽다가 주님 오시는 날 다시 부활하는 것만이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부활이라고 말씀드리죠. 그 이유가 뭐냐면, 부활은 뭘 이긴 거예요? 사망 권세를 이긴 거예요. 그런데 그 사망은 뭐냐면 죄의 삯이거든요.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바로 이 사망을 이긴 게 부활이에요. 그 부활은 한마디로 말하면 죄를 이긴 거예요. 죄의 삯인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죄를 이기는 것이 부활이에요.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는 죄악이 깔려 있어요. 죄성, 죄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죄를 이기시고, 우리 삶 속에 죄를 이기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문제는 부활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바로 그것을 알기를 원해요. 여러분, 어떤 문제 속에 있든지 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소망 속에 살기를 원해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내 삶이 힘이 나기를 원해요. 바로 그것이 부활이에요.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이상 처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간증할 수 있는, 부활의 소망 속에 살아가는, 부활 때문에 힘이 나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