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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5장 6절에서 9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의미로 다 함께 일어나서 말씀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말씀을 읽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오늘 우리가 읽은 6절부터 보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려 한다는 말씀이 나오죠. 7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과 같이” 여기도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또 9절에도 보면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나오는데, 하나님께 영광.

여러분, 지난주에도 제가 설교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대해서 얘기했죠. 우리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여러분 이런 설교를 들으시면 한 주 동안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십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사십니까? 그럼 고민을 하면서 사는 게 당연해요.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는 굉장히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 많아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길도 있어요. 아,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구나.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삽시다’인데요, 오늘은 로마서 15장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아, 이렇게도 영광을 돌릴 수 있구나라는 것을 배우고 그 길을 원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강한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니체라는 철학자를 아시죠? 그 사람이 뭘 말했냐? “신은 죽었다”라고 얘기한 사람이에요. 그가 말하는 신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한 걸까요? 그 사람이 그 말을 한 배경은 뭐가 있을까요? 이유는 뭐냐면 니체가 크리스천들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너희를 나약하게 만드는 하나님이다”라고 니체는 생각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고는 용서해 주신다는 핑계로 늘 세상에서 죄짓고 눈물 흘리고, 죄짓고 눈물 흘리고, 죄를 이기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신이 오히려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그럴 바엔 그 신은 죽은 거야. 신은 죽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사람들이 니체의 말에 호감을 가진 이유가 뭐냐면 우리의 잘못된 크리스천의 모습 때문이에요. 나약한 크리스천의 모습 때문에. 그러면서 그때 생겨난 사상이 뭐냐면 공산주의 사상이 생겨났죠.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상을 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해서 공산주의는 종교를 허하지 않잖아요. 하나님 믿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종교가 인민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거예요? 그 당시에 문화가,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나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죄 앞에서 넘어지고 나약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 모습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거거든요.

그런데 크리스천은 약합니까? 우리는 연약한 존재예요?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강한 자가 되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죄를 능히 이길 수 있는 존재예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때문에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1절에서 우리를 이렇게 표현해요.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 여기 보면 우리는 강한 자가 돼야 돼요.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강한 자가 돼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이지만, 우리 모두가 상한 갈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지만, 꺼져가는 등불 항상 그 모양으로 살라고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는 횃불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약한 존재로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하기 때문에,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강한 자다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해요.

사탄은 우리에게 자꾸 얘기해요. “진리가 밥 먹여주냐? 너 말씀에 순종하면 고생만 해.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 서울로 가면 되잖아. 굳이 뭐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어디 있냐”라고 하면서 우리를 점점 더 나약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지만,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능력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능히 이길 수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한 자들입니다. 이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해요.

그런데 우리가 강한 자가 되는 게 목표냐? 아니에요. 목표는 그게 아니에요. 강한 것은 도구일 뿐이에요. 강해서 뭐 하려고요? 강해서 뭐 하려고? 바로 여기 나온 것처럼,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예요. 우리의 강함의 목표는 연약한 자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자를 돕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려고 강한 자가 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기쁘게 하려고. 오히려 2절에 보면,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어떤 분은 착각할 수가 있어요. “이웃을 기쁘게 한다고 하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려고 하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 보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는 거예요.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되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예로 들어요. 예수님이 그러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러셨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 강한 자도 그렇게 해야 된다” 자기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기쁘게 하셨느

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잘 나타나고 있어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섬기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강하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약한 자를 섬기려고 오신 거예요. 그리고 섬김의 클라이맥스가, 그래서 자기 목숨을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섬기려고 오신 우리 예수님처럼, 바로 그것을 본받아 우리는 강한 자이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모습은 약한 자를 어떻게 하면 섬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섬김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이게 드러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거예요. 크리스천으로서 매일 넘어지고, 매일 쓰러지고, 크리스천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할 때는 하나님 영광 받지 않으세요. 그러나 우리가 강한 자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말씀에 의지하여 죄를 이기고 약한 자를 섬기며 살 때 우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꼬십니다. “너 강한 자가 되고 싶지? 너 강한 자가 되어야 해.” 그런데 사탄이 말하는 강함의 목표는 뭔지 아세요? 바로 내가 누리기 위해서요. 내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기 위해서 강해지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네 권리를 찾아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해서 너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려고 강한 자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강함의 목표는 섬김입니다. 섬김을 위해서요.

그러면 어느 정도의 섬김이 필요하느냐? 우리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약한 자가 드디어 강한 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섬겨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1절과 5절을 다시 한번 보면,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우리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느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이 선을 이루는 사람이 되고 덕을 세우는 사람, 즉 이웃이 강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누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제대로 섬김을 통해서 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강한 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4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 보면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살면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소망이 무엇으로 연결됩니까? 하나님께 영광과 연결이 되어집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왜 소망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냐면, 우리가 가진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들 솔직히 인간이 어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 인간은 그것을 이룰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 소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헨리 포드 같은 사람은 이 사람의 소망이 뭐였냐면, 말보다 더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그리고 더 빨리 갈 수 있는 그런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소망을 가지고 살다 보니까 차를 만들게 되고,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의 꿈이 다른 사람의 일을 시키는 일꾼들도 다른 사람의 보탬이 되는 일자리까지 제공하는, 그게 바로 소망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소망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은 어떠하겠어요? 우리 믿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은 사도 바울이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뭐라고 표현하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 있게 하신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산 소망입니다. 산 소망은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은 우리들은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살아 있는 소망,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성령님 때문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13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다시 말해서 우리 성령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그 소망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 이루심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 소망을 충만하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다른 성경에는 잘 안 쓰지만, 로마서 15장 30절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 성경 다른 구절에서 성령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본 적 있으세요? 성령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주 접하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잘 안 쓰거든요. 여러분들, 성령님의 사랑이 뭘까요? 어떤 게 성령님의 사랑일까요? 저는 가장 크게 느껴지는 성령님의 사랑은 나 같은 죄인과 평생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사랑하는 우리 와이프도 저를 귀찮아할 때가 있는데, 우리 성령님은 거룩하신 분이 나 같은 죄인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천국 같은 좋은 곳에만 계실 수 있는 분인데, 어떻게 보면 지옥 같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함께하시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 중에 하나는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 안 하면 사실 수 있는 분인데, 나 때문에 탄식하며 사시는 성령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성령님의 사랑이 있죠. 이럴 때 ‘지순한’이라는 단어를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성령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성령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무엇을 하시느냐? 로마서 15장 13절을 보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성령의 능력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나같이 연약한 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한 자로 만드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랑입니다.

성령의 사랑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이 충만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성령의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은혜의 개념 속에 살아갈 때 우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로마서 15장 15절부터 보면, “그러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 때문에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이걸 썼다는 것입니다. 앞에 나온 너희는 강한 자다, 너희는 소망을 품는 자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이런 모든 것을 썼는데, 무엇이 근본적으로 깔려 있느냐?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이 은혜 때문에, 은혜로 나는 주를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은혜의 개념 속에 사는 사도 바울을 보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도 이런 얘기 한 적 있는데요, 어느 나라 사람과 어느 나라 사람이 만나면 잘 사냐면, 한국 여자랑 중국 남자가 살면 잘 삽니다. 잘 안 싸우고 살아요. 한국 여자는 자기가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하는 게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요즘 젊은 분들은 안 그렇지만, 옛날 한국 분들은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중국 남자는 그게 남자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중국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중국 남편들은 결혼하면 바깥에서 일하고 와서도 집에 와서 자기가 요리를 해서 와이프에게 밥을 해 주고, 청소하고 빨래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둘이 살면 한국 와이프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우리 남편이 해 주네, 은혜다”라고요. 그런데 남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일 갔다 왔다고 와이프가 밥을 해놨잖아, 은혜다”라고요.

이게 반대가 되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한국 남자랑 중국 여자랑 결혼하면, 중국 여자가 밥을 안 해 주는 겁니다. 중국 여자는 당연히 남자가 해 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 남자는 안 해 주니까 서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 살게 됩니다. 이걸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적인 용어로 들어갑니다. “여자가 요리하고 청소하는 게 법인데, 중국 여자는 남자가 청소하고 요리하는 게 법인데, 그 법을 안 지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부부는 은혜 속에 살아가고, 어떤 부부는 율법 속에 살아갑니다. 자기 스스로가 만든 법에 의해 행복하게 사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자기 스스로가 만든 법에 의해 불행하게 살며 투정부리고, 신경질 내고, 짜증 내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의 개념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은혜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은혜로 느끼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책 중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쓴 책 중에 ‘The Present’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국말로 하면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이 사람이 자기에게 가장 큰 선물이 뭔가를 찾아 헤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선물이 뭐지 하면서 막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늘 어드바이저로 구하는 연 노인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선물이 뭐예요?” 그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살아봐, 경험해서 네가 깨달아야 돼.” 그런데 찾지 못합니다. 결국 그 노인이 이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The greatest present to you is the present.” 이게 영어로 하면 똑같은 단어인데, 한국말로 하면 “너에게 가장 큰 선물은 현재야”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present’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거든요. 하나는 ‘선물’이고, 하나는 ‘현재’라는 뜻입니다. 그 노인이 얘기합니다. “네가 신에게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현재야.”

이 말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선물은 또 다른 말로 하면 은혜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거저받은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현재가 가장 큰 은혜입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주신 짝이 가장 큰 은혜이고, 현재 여러분에게 주신 자녀들이 가장 큰 은혜이고, 현재 여러분에게 주신 직업이, 어떻게 보면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혜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의 개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관계마저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짝을 보면서 “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가정이. 그런데 짝을 바라보면서 “인간적으로 내가 한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자체부터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니는 우리 영락교회, 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이 교회에 출석할 수 있으며 이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교회 생활을 정말 행복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 교회는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현재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것. 여러분이 부모에게 뭘 했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죠. 은혜입니다, 은혜. 건강한 것 역시 내가 열심히 운동했기에 내가 건강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정말 건강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건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의 개념이 왜 중요하냐면, 은혜의 개념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냐면 사도 바울은 은혜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은혜의 관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의 개념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크리스천 투데이에 저널을 썼던 시먼스라는 분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요즘 크리스천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은혜가 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 살면서 은혜를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두 번째 문제는 다른 사람을 은혜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알아야 다른 사람을 은혜로 대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죠. 남편을 은혜로 여기면 은혜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서로 행복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5장 6절에 그런 표현을 합니다.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사람이 한 마음 한 입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서로를 은혜로 여기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불평이 없어져요. 은혜로 여기면 하나님께 그 관계를 통해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로마서 15장 7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여기서 ‘서로 받는 것’은 서로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서로를 용납하고 살게 됩니까? 서로의 관계를 은혜로 여길 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야.” 이렇게 여기면 서로 용납하게 되는 은혜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은혜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은혜의 개념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개념으로 삶으로 말미암아 나 혼자만 좋다가 아니라 상대방을 은혜의 개념으로 알아서 은혜의 관계가 형성됨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것인지 결단하십시오.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령님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강한 자로 이미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입니다. 강한 자이기에 이제는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강한 자로서 이제는 연약한 자를 세워주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약한 자를 기쁘게 함으로 그 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간증할 수 있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데, 그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그 소망을 붙들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아, 하나님의 은혜구나”라고 여겨 관계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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