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20장, 읽기는 24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하면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Amen. 사도행전 20장은요, 사도 바울이 3차 여행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자신이 사랑하는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 놓고 말씀을 전하는 부분이에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좀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자신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에베소 교회에 있는 장로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설교를 하는 부분이 사도행전 20장이에요.

이 설교를 보면서 사도 바울처럼 오늘 이 말씀을 전하기 원해요. 뭐냐면, 우리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부분에 대해서 설교를 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설교 제목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첫째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20장의 시작 부분에 보면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가 나와요. 사도 바울이 설교를 했는데 7절에 보니까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 이튿날 떠나고자 그들에게 강론을 합니다. 설교를 합니다. 근데 설교가 밤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설교가 좀 길었어요. 설교가 길었어요. 그런데 8절에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라. 깊이 자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깊이 잠든 것 같아요, 아예 그냥. 그런데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함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에서 떨어지는 것을 이렇게 보니 죽었느니라. 그러니까 유두고라는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죽습니다. 이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요. 누가 죽었다는 얘기를 먼저 시작합니다. 이 청년은 왜 죽은 걸까요? 물론 떨어져서 죽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요? 이 청년이 죽은 이유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었다. 안 그래도 길었는데 9절에 보니까 강론하기를 더 오래함에 사도 바울의 설교가 길었다. 그런데 스퍨전 목사님이란 분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만약 여러분들 오늘 제 설교를 듣다가 졸다가 죽으면 여러분을 살려줄 사도 바울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설교를 들으시길 바랍니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참 재미있는 게, 이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이 ‘다행이다’입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사도 바울이 있어서 이 죽은 유두고를 살려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유두고 청년이 죽은 근본적인 이유는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말씀이 배가 고파요. 그리고 말씀을 먹고 싶어요. 그리고 말씀을 사모해요. 마치 음식을 사모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은 음식을 사모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런 게 없었던 거예요. 이 사람은 은혜를 사모함이 없었어요. 말씀을 들으러 나왔어요. 마치 여기 있는 모든 분들처럼 말씀을 들으러 나왔어요. 그런데 말씀에 대한 사모함, 말씀에 대한 배고픔, 은혜에 대한 사모함 이런 것이 없어요. 이 자리에 대해서 죽었다라는 표현을 써요. 특별히 영적으로 죽었다라는 건 뭐냐 하면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 보니까 본인이 뭘 하면서 살아야 되는지 모르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뭘 해야 되는지 모르는 거예요. 이게 죽은 자예요. 주를 위해서 뭘 해야 되는지를 모르는 것.

그런데 그것과 비교되는 사람이 있죠. 사도 바울이에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오늘 읽은 24절에 이렇게 표현해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하면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분명히 뭘 하면서 살아야 되는지를 알고 있어요.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까지도 바치면서 내가 뭘 해야 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어요. 이것이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라는 거예요.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요즘 뉴스 같은 경우 보면 이 바다의 온도차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걸 보잖아요. 제가 무식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처음에는 어부들이 참 좋아하겠다 그랬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물고기는 먹지도 못한대요. 그냥 쓰레기예요. 여러분들, 죽어있는 건요, 죽어있다는 얘기는 그렇게 비참한 거예요. 아무것도 못해요. 쓰레기예요. 그런데 그런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어떤 물고기는 연어 같은 경우에 보면 그 고향을 떠나서 바다로 여행을 하다가 산란 때가 되면 거슬러 올라오면서 장렬하게 죽잖아요. 산란을 하고 죽는… 그게 얼마나 장엄하냐면 다큐멘터리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처음에는 저는 맛있는 연어를 죽는 게 아까웠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귀하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해준 사명을 그 물고기가 정말 그 사명을 다 하고 죽는 거잖아요. 저게 진짜 살아있는 게 아닐까? 저게 아름다운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살아 있다는 건 뭐냐 하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뭔지를 알고 그 일을 위해서 감당해 나가고 있는 것이 그게 살아있는 거다라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매주일 들을 설교 앞에서 여러분들이 반응이 되어야 해요.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야 해요. 그냥 뭘 해야 되는지를 알잖아요. 그런데 말씀 앞에 나오면서도 느끼는 게 없고 반응이 없고 자극받는 것이 없고 뭘 해야 되는지를 모른다면 내가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우리는 해봐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성도들이 이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도전이 되길 원해요. “내가 달려갈 길과 내가 뭔가를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삶을 지금 살아가고 싶다. 주를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내가 지금 사명이 뭔지를 좀 알고 싶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복음을 증언하는 일, 내가 정말 주의 말씀을 전하고 증언하고 전도하는 이 인생을 살고 싶다. 그래서 이런 인생이 너무 힘이 나서 정말 나의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내 생명 바쳐서 내가 뭔가를 하고 있는, 주를 위해서 하고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이것이 여러분의 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 두 번째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건 뭐냐면 은혜의 말씀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32절에 보니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 사도 바울의 신학을 이렇게 좀 보면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 부류로 분류하는 느낌이 있어요. 하나는 율법의 말씀. 물론 이제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이니까 구약에 정통한 사람이니까 사도 바울은 구약을 율법의 말씀 이렇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또 다른 말씀,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의 말씀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율법의 말씀은 율법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율법은 뭐예요?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돼요? 죄의 삯은 사망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율법의 말씀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는 거냐면 죽어. 넌 죽을 수밖에 없어. 넌 죽을 수밖에 없어.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율법의 말씀은. 그런데 그런 율법의 말씀이 왜 우리에게 필요해요? 왜냐하면 내가 죄인이고 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뭐가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은혜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말씀도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이 율법의 말씀이라는 건 뭐냐면 살리는 말씀이에요. 살리는 말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 우리에게 능력을 주는 말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혜의 말씀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하냐면 32절을 다시 읽으면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줘요. 우리를 든든하게 굳건하게 세워주는 것이 은혜의 말씀이다. 그리고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느니라” 은혜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업이 있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그 은혜의 말씀이 바로 기업으로 남게 하는 것. 그것이 은혜의 말씀이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세워주고 기업이 되게 하는 정말로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말씀을 붙들고 은혜의 말씀 속에 살아야 한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솔직히 세상의 말도 능력이 있어요. ‘멘토, 마스터, 매거거’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자기가 경험한 것을 통해서 교육에 대해 쓴 책이에요. 그런데 거기 보면 무슨 얘기가 나오냐면 자기는 원래 국민학교 다닐 때 똑똑하지도 않고 머리도 좋지 않고 체력도 못 따라가고 재주도 없었대요.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알고 있었대요. 그래서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는데, 새로운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을 맡게 됐는데 그 선생님 이름이 배틀이에요. 배틀하는 선생님이 맡았는데, 늘 배틀하는 선생님은 이 애한테 그런 얘기를 한 거예요. “I need you. 나 네가 필요해. 네 도움이 진짜로 큰 도움이 되고 있어. 그리고 넌 잘할 거라고. I trust you. I believe in you.” 라는 이 소리를 들은 거예요.

사람의 말이 이 사람에게 깊이 새겨진 거예요. “나도 나를 못 믿는데 선생님이 나를 믿는다니. 선생님이 내가 필요하다고 하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겼고,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됐으며 결국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되고 교육에 대한 책을 쓰기까지 됐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서 한 사람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얘기한 거예요.

옛날 우리 어른들도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옛날에는 침대가 없고 이불이 옷장에 있었죠. 그래서 잘 때는 옷장을 열고 이불을 꺼내서 펼치면, 애들이 기분 좋아서 먼저 이불 위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곤 했어요. 그러면 두 종류의 할머니가 있다고 해요. 한 종류의 할머니는 “정승같다, 정승같다”라고 말해요. 그러면 나중에 진짜 정승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할머니는 “찝새같이 와서 딱 앉는 거 보니 도둑 고양이냐”라고 하죠. 그러면 결국 그 아이는 도둑이 되어 감옥에 간다는 이야기예요. 옛날 우리 어른들도 사람의 말 한마디가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람의 말에도 그렇게 큰 힘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 있겠어요. 특히 은혜의 말씀, 우리를 살리는 그 말씀, 그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세우고 기업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 살기를 소원해야 해요.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것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꽂혀야 해요.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좋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꽂아준 그 말씀이 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로마서 10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죠.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왜 못 믿는 거예요? 전파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못 믿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전파한다고 다 믿나요? 아니잖아요. 전파하는 그 말씀이 그 사람에게 꽂힐 때 거기에 역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꽂아주시고 여러분의 것이 될 때 그때 그 능력의 말씀이 되는 거예요.

바로 그러한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해요. 사도 바울의 표현이 재미있어요.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워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성도들을 정말 사랑했다. 그리고 장로님들, 장로님들을 정말 사랑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을 전했다. 이제 제가 떠날 건데,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이 표현이 재미있어요. 말씀에 부탁을 한대요. 보통은 누구에게 얘기하죠? “친구야, 이분들 좀 부탁해”라고 하잖아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얘기하는 건데, 사도 바울은 “말씀에 부탁합니다.”라고 표현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말씀 자체를 살아있는 인격체로 보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하나님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부탁합니다라는 표현을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니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이 은혜의 말씀 자체가 살아있고 능력이 있고 역사하는 것이에요. 이미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그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 앞에 다가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카바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렇게 얘기해요. “The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 이미 성경 안에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 앞에 가기만 하면 말씀 앞에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주도자가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도해주시는 거고, 성경이 살아서 나를 주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바로 그것을 사모하면서 우리는 그 말씀 앞에 나가는 거예요.

특별히 말씀을 통해 세워진다고 할 때, 헬라어로 “오이코스”라는 단어가 들어가요. 오이코스는 집이라는 뜻이에요. 마치 집을 짓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하나하나 세워져 가요. 한 번에 딱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면서 나를 하나하나 변화시키고 세워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님, 내가 이 시험 이기지 못해요. 나는 너무 좋아.” 하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내가 변화되면서 결국은 시험도 이기고 살아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것을 믿기 때문에 “나는 떠나지만 내가 사랑하는 장로님들에게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떠납니다.” 하는 이유가 그 말씀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 은혜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사모함으로 말씀 앞에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Bob Shank라는 분이 “Total Life Management”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의 내용은 삶을 어떻게 잘 매니저하면서 사는 것이냐에 대한 것이에요. 이분은 강조하기를, 목적과 목표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목적과 목표를 혼동하며 사는데, 그러면 여러분의 삶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다는 거예요. 목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리고 목표는 변해요. 그래서 제대로 삶을 관리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 목적 때문에 목표가 생겨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요.

이분은 또 이런 얘기를 해요. “보통 사람들은 70년의 인생을 산다면 30살까지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30살부터 70살까지는 살았지만 무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요. 뭐가 있죠? 공부 잘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어요. 그리고 좀 더 크면 “내가 뭐가 되어야지” 하는 목표를 세우기 시작해요. 그리고 30살 정도 되면 이제 그 목표가 이루어진 거예요. 그런데 30살 이후부터는 목표에 대한 생각을 잘 안 해요. 그냥 애들 키우느라, 먹고 사느라, 집 페이먼트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그래서 목표나 목적에 대한 생각 없이 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이분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살아있지만 무덤 속에서 사는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목적과 목표 없이 그냥 살고 있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맞는 얘기 같아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 책에 그런 얘기를 해요. 어떤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그게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느냐고 하면서 이 사람이 얘기하는 게 뭐냐면 목표는 있지만 제대로 된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요. 목표는 뭐예요? 내가 공부 잘하는 게 목표예요. 그게 안 되니까 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다고 생각해서 인생을 포기하는 거거든요.

그렇지만 제대로 된 목적 때문에 그 목표가 생겼으면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렇다면 제대로 된 목적은 뭘까요? 여러분들, 우리 모두에게 내 스스로가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평생 변하지 않는 목적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목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요. 변하지 않는 목적이 있어요. 그건 뭐냐면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변하지 않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 목적을 갖고 살기를 원해요. 그런데 소요리 문답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면 좀 더 적극적인 목적이라는 거예요. 내가 억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즐거워서, 내가 기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제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까 그 학생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공부 잘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성적이 좀 안 나온다고 해서 목숨을 끊지는 않아요. 그렇죠? 제대로 된 목적이 없으니까 인생을 방황하는 거예요. 그렇죠? 제대로 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 때문에 목표가 생기는 것, 그게 다음 단계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번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목표입니다. 그 목표는 뭐냐면 내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목표예요. 어떻게 목표가 생겼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까? 그건 바로 내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그 목적을 가진 사람은 목표가 다 달라요. 사도 바울처럼 내 생명을 바쳐서 다른 일 안 하고 복음을 증거하며 살 거야 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 직장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라고 생각하며 그 목표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가정주부들도 ‘내가 이 가정에서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 하는 목적 때문에 다른 목표가 생길 수 있고, 그 목표는 계속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사명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한 얘기하면서 목적과 목표를 얘기할까요? 그 이유는 뭐냐면 제가 설교하면서 항상 느끼는 게 성도들은 사명을 너무 크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가지고 사십시오’라고 하면 ‘나는 사명이 없는데, 저건 다른 얘기야’ 하고 다른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명은 그렇게 거대한 게 아니에요. 사명이라는 건 뭐냐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을 가지고 이제는 뭘 할까를 찾는 것입니다. 그게 사명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적과 목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명이 뭔지를 좀 알라고요.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좀 더 쉽게 표현을 해요. 쉬운 표현을. 그게 35절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인 바와 같이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준 것처럼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는데,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그 말씀을 여러분들 기억하십시오.” 이게 사명과 연관이 있어서 얘기하는 거예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뭘 줄 수 있는 것이 그게 사명입니다. 그렇게 거대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뭘 줄 수 있잖아요. 그것이 사명인 거예요. 많은 사람들의 꿈일지 모르지만 내가 돈이 많아서 누구에게 돈을 나눠줄 수 있다면 그것도 사명일 수 있습니다. 사명일 수 있어요. 제대로 된 목적만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름다운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분이 회사를 다니던 분이 저한테 그래요. “목사님, 제가요. 저를 위해서 좀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왜요?” 그랬더니 “목사님, 제가 이 회사에 사장이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저는 이렇게 그런 기도 제목을 들으면 처음에 느끼는 게 뭐냐면 대단히 세속적으로 큰 꿈을 갖고 계신 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나한테 이런 걸 부탁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 분이 왜 그런 얘기를 기도 제목으로 설명하시더라고요. 그게 뭐냐면 “목사님, 제가 이 회사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정말 많이 아는데 이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려면 체계적으로 이 회사가 바뀌어야만 가능하다는 걸 자기가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이 회사가 체계적으로 복음화되는 회사가 되기 위해서 내가 사장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사장이 되고 싶은 겁니다.” 라고 얘기했을 때 저는 그 분의 꿈을, 그 분의 목표를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목적이 제대로 있으니까 그 분이 목표를 갖고 있다 보니까 그런 목표도 생기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런 사명을 갖기 위해서는 그 사명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어요? “주는 것, 네가 줄 수 있는 것이 사명이다”라고 얘기했잖아요. 내가 뭘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명이 있었는데 나라가 태평하니까 권태로운 거예요. 뭔가 익사이팅하고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답을 몰라요. 그래서 상금을 걸었어요. 큰 상금을 걸면서 “나한테 이 답을 알려주시는 사람에게 내가 상금을 주겠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어떤 인간들은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해서 왕이 사람을 사형에 처해버렸어요. 제대로 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떤 소녀가 와서 “내가 왕이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것을 알려드리겠다”고 한 거예요. 소녀를 불렀어요. 그랬더니 소녀가 왕 앞에 오자마자 다짜고짜 뭐라고 했냐면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왕이 “왜?”라고 묻자, 소녀가 “왕은 기쁘게 살 것을 단념하십시오. 왕은 행복하게 살 것을 단념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남을 기쁘게 해본 적이 없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왕이 행복하고 기쁘게 살고 싶으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면 왕은 행복할 것입니다.” 진짜로 큰 지혜죠. 거기에 답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오연호라는 한국의 작가가 있어요. 이분은 미국을 싫어하는 분이에요. 기자인데, 그래서 항상 미국인들이 뭐만 잘못하면 기사를 쓰고 그걸 다 모아서 책을 내곤 했던 사람이에요. 얼마나 미국이 싫었으면 그렇게 했겠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미국에 한 번 가봤냐?” 생각해보니 미국에 가보지도 않고 자기가 쓰는 게 웃기잖아요. 그래서 미국에 유학을 갔어요. 이분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왜 미국이 미국인지. 그게 뭐냐 하면, 미국 사람들은 망할 수가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발렌티어 정신’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맞는 것 같아요. 희한하게도 미국에서 잘하는 애들은 발렌티어를 잘해요. 발렌티어를 잘해요. 학교에 들어갈 때도 성적만으로 평가하지 않잖아요. 어디서 발렌티어를 했는지를 중요시하잖아요. 미국의 정신이거든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미국 교회는 어디서 누가 필요합니다 하면 발렌티어 종이가 붙잖아요. 그러면 금세 이름이 쫙 적혀요.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붙여놓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발렌티어 정신이 부족해요. 발렌티어가 대단한 것인 줄 알아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봉사 부서가 필요하다고 하면 많은 분이 “목사님, 기도해 보고요. 그리고 성령님이 저한테 도전을 주시고 어떤 느낌이 오고 깨달음이 있을 때 할게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드디어 사인을 하면 저한테 와서 간증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 설교 때 봉사라고 했는데 그게 제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 때문에 봉사하게 됐어요.” 정말 아름답고 대단한 간증이지만, 너무 크게 생각하는 거예요. 너무 크게.

그래서 제가 뭘 하라고 하면 거절하는 이유가 자격이 안 돼서예요. 자격이 안 돼서요. 이 말은 즉, 너무 크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내가 뭔가를 발렌티어하고 남에게 뭔가를 주려고 하는 것 자체를 너무 크게 생각하다 보니까 아예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의 멘탈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 종이가 나오면 그냥 해보자고 사인해요. 그런데 두 명만 필요한데 10명이 사인했잖아요. 그러면 두 명 뽑히고 8명은 안 되잖아요. 그러면 “아니면 말고.” 한국에서는 난리가 나죠. “나는 왜 안 되냐, 나에게 뭐가 문제가 있냐.” 이게 무슨 얘기예요? 그분한테는 그게 뭐가 그렇게 큰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발렌티어 정신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 마인드 자체가 세팅이 안 돼 있는 거예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명 얘기 자체가 너무 무거운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내 사명이 뭔지 모르겠다고만 그냥 얘기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사명은 뭐냐면,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줄 수 있으면 그게 사명이에요.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완벽한 건 하나님이세요. 내가 완벽하기 때문에 뭔가를 하려는 것은 여러분이 교만한 거고, 그런 분은 사역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를 막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혼자 영광 받으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내가 조금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게 사명이에요.

저는 우리 성도들이 사명이 뭔지 몰라서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일을 감당함으로써 사명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인가? 내 영적인 상태가 어떤가? 살아는 있는데 골고루란 상태인지 정말 살아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살아있다면 말씀에 배고파야 돼요. 은혜를 사모해야 돼요. 그래야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에 배고픈 사람은요, 은혜의 말씀을 받을 줄 알아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이런 간증이 있기를 원해요. 내가 은혜의 말씀 속에 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나를 세워주고 그것이 나의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 때문에 내가 변화되고, 말씀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거죠. 그래서 결국에는 사명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사명은 이거예요. “저 한번 해볼래요. 이제 이 길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제 목표는 이것이에요. 또 바뀔 수 있는 목표는,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을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런 목표가 생겼고, 나는 이 목표를 향해 살길 원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더 이상 죽은 성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있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