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창세기 45장을 함께 읽고, 말씀을 듣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기가 막힌 장면입니다. 요셉과 요셉을 팔아버린 형들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형들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종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형들은 다시는 그를 안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쌀을 구하러 온 형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형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아마 그만큼 미웠을 거예요. 미울 수밖에 없죠. 그런데 이 장면이 왜 기가 막히냐 하면, 요셉이 울면서 형들을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왜 그랬는지 따지지 않아요. “누가 날 죽이려 했느냐”, “누가 반대했느냐” 이런 식으로 따지지도 않고, 그저 용서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요셉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용서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거든요.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관계 회복은 진짜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제 24일, 한 달도 조금 넘게 남았죠?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연말이 가기 전에, 해가 가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관계 회복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먼저 우리 죄를 사해 주셔서 우리는 죄를 사해 주고 용서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들이 관계를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어요.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태복음 6장 12절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어떻게 우리가 관계 회복을 할 수 있는가’, ‘관계 회복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요셉을 보면서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형들이 그를 팔아버려서 어떤 집의 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감옥에 가기까지 했죠. 보통 사람 같으면 형들을 어떻게든 죽이려는 생각을 하며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이 문제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고민했던 사람이죠.
요셉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표현합니다. 7절에서도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을 세상에 남기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요셉은 용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아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요셉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고, 그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가 보였던 것이죠.
보통 많은 분들이 아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이만큼 많이 아는 구절이 또 있죠. 바로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여기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결국에는 선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저희 집이 굉장히 잘 살았습니다. 뭐, 옛날 얘기하면서 잘못 산 집이 어디 있겠냐만, 저희 집은 전교에서 제일 잘 살았어요. 선생님들이 다 저희 집이 잘 사는 걸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장 선생님을 저희 자가용으로 모시러 간 적이 있거든요. 농구 시합 같은 게 있을 때마다요.
제가 그 당시에 살던 아파트는 동부이촌동에 있는 78평의 반도 아파트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은 아파트를 여섯 채나 가지고 있었고요, 용산에 빌딩도 있었어요. 아직 기억하는 것이, 우리 어머님이 그 빌딩에 있는 식당에 세 들어갈 때가 기억납니다. 절 데리고 가셨거든요. 그 주인이 정말 깍듯하게 우리 어머니를 모시며 식사를 대접하고 돈을 드리면서, 왜 절 데리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건물주 아들의 위엄을 느껴보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 집은 정말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님 사업이 너무 잘되다 보니, 원단을 중동에 파셨는데 물량이 너무 밀렸다 보니 우리 아버님이 아예 공장을 사자고 결심하신 거예요. 그래서 부산에서 제일 큰 방직 공장을 사셨습니다. 아파트들을 모두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대구의 가장 큰 공장을 사신 겁니다.
그런데 얼마 안 돼서 알게 되었어요. 그것이 사기였다는 것을요. 우리 아버님이 사기 친 사람을 고소했고, 그 사람은 맞고소를 했어요. 그래서 재판이 약 2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한국 재판은 누가 옳으냐의 싸움이 아니라 ‘백의’ 싸움이에요. 그 당시 우리 아버님은 이길 거라고 확신했었어요. 왜냐하면, 제 친구 아버님들이 검찰총장과 국방부 장관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아버님은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백’은 대구 시장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재판이 있었는데, 우리가 졌어요. 저희 아버님은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이 날아가고,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어요: “야, 대통령이 가도 대구에서는 대구 시장을 못 이긴다더라.” 당시 대구는 대구 시장이 가장 큰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기를 당했다고 해도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차압되고, 채무 독촉이 들어오면서, 아버님은 외국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홀로 모든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저보고 대구로 가자고 하셨어요. 사기 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대구로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 사람을 갈비집에서 만났는데, 갈비를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전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저에게 사기를 당했던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가 예전 돈을 열심히 모아서 집을 사려고 했는데, 부동산 업자가 큰 집이 나왔다고 보여줬대요. 주인은 외국에 가 있어서 볼 수 없지만, 금방 온다고 했답니다. 문패에 적힌 이름을 보여주며 빨리 사라고 했대요. 이름을 보고 같은 사람 집이구나 하고 믿고 다방에 가서 계약했대요. 그런데 이사하고 보니 주인이 다른 사람이었다더군요. 자기도 사기를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 이제 일어서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제가 어린 마음에 사기당한 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사기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어머님이 계속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머님은 독학으로 공부하신 분이셨죠. 어머님은 “너희들은 가난을 몰랐으면 했는데 이렇게 됐다” 하시며 계속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보니 빚이 많아서 어머님이 감옥에까지 가게 되셨습니다. 그때 대구에서 그 사람은 제 철천지원수였습니다. 한동안 대구사람까지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이 그렇게 잘 살다가 망했습니다. 전교생이 다 알았어요. 우리 엄마는 감옥에 있다는 것도요. 제일 잘 사는 집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된 겁니다. 담임 선생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 챙겨 주셨는데, 그것도 싫었습니다. 전교 친구들이 모두 알아보면서 저는 철천지원수라고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내가 언젠가 저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기당한 이야기를 보면, “저 죽일 놈” 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원래 말하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그 원수 같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고마워졌습니다. 그건 제가 목사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사람 덕분에 우리 집에 목사가 세 명이 생긴 겁니다: 저, 아버님, 그리고 제 동생까지. 그 사람이 사기를 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옛날에 이른바 ‘오렌지 족’으로, 세상의 쾌락 속에서 돈 쓰며 잘난 맛에 살았을 겁니다. 그 당시 제 신앙도 좋지 않았고, 신앙생활을 잘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를 보니 그 사람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미워지지 않아요. 솔직히, 안 미웁니다. 오래전에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저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섭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로, 요셉은 형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5장 4절을 보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팔았더라.” 이 표현은 정말 귀합니다. 요셉은 자기를 판 사람들을 형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용서할 수밖에 없었겠죠. 사실 ‘형제’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들은 엄마가 다른 형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용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쟤는 용서 안 해도 돼. 내 형제가 아니니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교적으로 보면, ‘포텐셜 브라더(Potential Brother)’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가능성의 형제의식을 가지고 용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언제가 예수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해야 하고 미워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중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교회 가는 아내를 힘들게 할 때, 어떤 아내는 “우리 남편은 마귀야”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기분은 이해하지만, 남편을 마귀라고 여기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누가 마귀를 전도하고 싶겠어요? 그러나 그 사람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형제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용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 믿는 사람도 포텐셜 브라더(Potential Brother)라고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지금의 믿음의 형제들, 즉 우리 가족들은 더욱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는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러분,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속상할 때가 언제입니까? 아이들끼리 싸울 때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다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화목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관계를 회복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요셉은 복이 되는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의 사명입니다. 요셉은 자기의 사명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에 요셉은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로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하시려고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은 7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자기 삶의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요.
여러분, 요즘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은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정신병이고, 그중에서도 우울증이 가장 많습니다. 제 아내는 약사인데, 약을 사러 오는 손님 중에 우울증 약을 처방받는 환자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이 병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고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해지면 자살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에 관한 연구가 많은데,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할까? 나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는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는 것으로 이어지죠. 어떤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남들이 무시해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우울증의 시작입니다.
우울증의 시작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정신적 자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를 택하고 자녀로 삼으신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고, 복을 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존재 이유를 아는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용서할 수 있으며, 화목하게 살아갑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하니,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죠. 이를 사명으로 아는 사람은 바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복이라 말했을 때, 나 때문에 큰 복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이 나로 인해 복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 순간에도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를, 우리의 사명을 제대로 깨닫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며, 화목하며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결론 내리겠습니다. 오늘 설교가 빨리 끝난다고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성찬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화해하라고 말씀드리죠? 용서하라고도 말씀드립니다. 많은 분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먼저 사과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는 피해자가 먼저 다가가야 이루어집니다.
요셉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형들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누가 다가갑니까? 요셉이 형들에게 다가갑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잘못을 추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하며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우리는 브라더, 가족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스스로 ‘나는 복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나로 인해 당신이 복을 받는다면, 그것이 나의 행복이고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피해를 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이야기할 때 그곳에 용서와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 성도들이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관계가 어그러진 사람들, 용서하지 못한,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보세요. 다만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는지 모를 경우 ‘내가 너를 미워했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삐뚤어진 관계를 바로잡고, 이제는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