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가 창세기 15장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1절부터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갑자기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신 것이죠. 1절을 보면,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줄게”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이는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또한, 5절로 가면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셔서 하늘의 별을 보라고 하십니다. “네가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네 자손이 이렇게 별처럼 많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이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언약’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베리트’라는 말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자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누군가와 약속을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족쇄를 달고, 얽매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얼마나 자유로운 분입니까?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선택적으로 하시는 장면입니다. 꼭 하실 필요는 없는데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너에게 약속할게. 이렇게 해 줄게”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은 쌍방적 약속이 아니라 일방적 약속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그냥 해 줄게”라는 것이 바로 그 약속입니다.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줄게”라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이었다면 이 약속을 후회했을 것 같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행한 행동들을 보면 참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종 되었던 그들을 구출하셨을 때도,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평을 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조건 없이 그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실 것을 계속해서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행하실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를 만드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자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약속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교제하고 싶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입니다. 사랑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살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사랑하니까 서로에게 서로를 약속하며 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언약을 맺는 과정과 그 언약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언약을 확증하는 모습들이 오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어 주시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두려움 속에 있을 때 말씀으로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 창세기 15장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4장의 스토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14장에서는 다섯 나라와 네 나라가 연합하여 싸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과적으로 네 나라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조카가 다섯 나라 연합에 속해있다가 전쟁에서 지고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었고, 아브라함은 나라가 아닌 한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정은 매우 부유했고, 집에 종이 318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로 연합군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여기 14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까요? 기습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신들은 밤에 적을 습격하여, 기습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 그리고 그의 재산과 가족들을 모두 찾아오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문이 날 것이었습니다. 어떤 소문이 나겠습니까? 네 나라가 318명에게 졌다는 소문입니다. 그러면 네 나라의 왕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우리 군대가 318명에게 졌어? 아브라함을 가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겠죠. 아브라함도 그걸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없겠죠. 여러분 같으면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으로 넘어갑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기서 “이후”는 그 전쟁 후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덧붙여 말씀하세요. “나는 너의 방패요.” 이 말은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방패를 줄게”가 아니라, “나는 너의 방패가 되어 줄게”라는 것이죠. 아무리 군사가 많아도,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르는 아브라함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깨어 계셔서 지키신다면, 그보다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방패가 되리라” 하시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브라함을 보며 부럽지 않으십니까? 내가 근심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와서 “걱정하지 마,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줄게”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부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이 말씀을 성경을 통해 주고 계십니다. 성경 연구자들에 의하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성경에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1년 365일, 즉 매일 매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꿈이나 음성으로 듣지 않더라도 성경을 통해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말씀을 읽으며 은혜를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믿으세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게 된 과정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하다가 신앙이 좋아져서 신학교에 가지만, 저는 신앙 생활을 거의 하지 않다가 신학교에 갔습니다. 신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하나님께서 술을 끊게 하셨습니다. 내가 원해서 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이 끊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학교가 6월에 입학을 받았는데, 7월까지도 술을 마셨습니다. 신학교는 9월부터 시작이니까요. 그 당시에는 술도 못 끊는 상태였습니다.
제 아내도 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신학교에 가지?” 하지만 결국 저는 신학교에 갔습니다. 신앙이 좋아서 신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셔서 간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이 “성경을 한 번 읽어라”라고 하셔서 졸면서 억지로 읽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도 제대로 읽지 않고 중간에 건너뛰었으니 사실상 읽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가니 전도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조그마한 약속의 말씀들 책자를 봤습니다. 거기서 은혜로운 구절을 찾았고, 그 구절이 나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구절일 것입니다.
여기 이사야서 41장 10절의 말씀 있습니다. 아는 분들도 있죠? 굳이 띄우지 않더라도 잘 아는 말씀이에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저에게는 전도사 시절에 처음 들어본 구절입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이 구절이 저에게 굉장히 강력하게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까.” 그때부터 이 말씀은 저에게 두려움이나 걱정이 생길 때마다 붙드는 말씀이고,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만 주신 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이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줄게. 내가 너와 함께할게.”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 언약의 말씀을 받으면 질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 여러분은 “이게 무슨 말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1절에서 아브라함은 언약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가 되어 줄게. 그리고 너의 지극히 큰 상이라.” 쉬운 말로 하면, “너에게 상을 줄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통 이런 언약의 말씀을 주시면, 성도들은 “아멘”이라고 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멘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상을 줄게”라고 했더니, 아브라함은 “저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다메색 사람 엘리에셀입니다.” 엘리에셀은 그 집의 종으로, 아브라함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얘가 나의 상속자 맞나요?”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아브라함은 주께서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집에서 길린 자가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질문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앞에서 주제를 돌린 것 같지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런 얘기를 꺼냈을까요?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입장이 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영어 이름이 아브라함이라 그런지 몰라도 이 상황이 저에게는 아주 은혜롭게 느껴집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서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에게 주신 큰 약속인 “상속자를 주겠다”라는 말씀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상속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상속자가 있어야 재산을 물려주고, 모든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상속자의 존재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큰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자, 작은 약속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불신의 질문이 아닙니다. 믿고 싶어서 더 확실하게 믿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궁리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상속자를 약속하셨는데, 혹시 내 씨가 아니라 집에 있는 종이 상속자가 되는 것인가?”라고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는 이미 과학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를 넘어섰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믿고 싶었기 때문에, 더 확실한 믿음을 위해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신 모든 약속의 말씀이 다 믿어지지는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에는 처음 병에 걸렸을 때 “너는 죽지 않을 거야”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는 저에게 큰 문제였습니다. 병이라는 게 큰 문제였지만,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작은 약속들을 계속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직 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방식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살지 않고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이지?” “몇 년 산다는 이야기인가?” “몇 개월 산다는 이야기인가?” 이런 식으로 제 머릿속으로 그 약속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만, 뜻을 잘 모르니 계속해서 스스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약속의 말씀을 받으며 확신을 가지려는 모습은 하나님께 계속 질문하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분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가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부 예배 때 설교를 했을 때 조금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2부 예배에서는 설교를 짧게 하려는 결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중요한 내용은 다 전하려고 합니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곧 청소하실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설교를 줄이려고 했지만, 전하고 싶은 내용이 많습니다. 시험에 들지 마세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질문을 자주 던지지 않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불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데, 이를 불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질문해 봤자 응답이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살아가기도 바쁜데 무슨 질문이냐”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예 약속을 잊어버려 질문할 내용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신앙적으로 “은혜가 내게 족하다”라고 하여 질문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아브라함 신앙의 위대한 점은 바로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게 무슨 뜻인가요? 저는 이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이게 맞나요?”라고 믿음을 가지고 질문하면, 하나님은 응답을 주시는 신기한 분이십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제가 1절과 2절을 묵상하면서 초기에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묵상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묵상이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조용히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침묵’, 스위스 영화 속에서 수도원에 들어가 대사가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2절 말씀처럼,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의 음성은 시끄러움 속에서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조용히 하는 것이 가끔 필요합니다. 질문을 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조용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니, 아브라함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답은 정말 기가 막힌 대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익숙해서 잘 모르실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이라면 그 대답이 얼마나 놀라운지 느낄 것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별을 보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한 기가 막힌 응답입니다.
왜 이 대답이 기가 막힌지 아세요?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밤하늘에 하나님이 데리고 나가서 “자, 별을 봐. 저 별처럼 네 자손이 많을 거야.”라고 하니까 힘이 나잖아요.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쳐다볼까요? 하늘을 쳐다보겠죠. 여러분도 그렇게 하겠죠.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낮이라면 하늘을 올려다봐도 별이 보일까요? 안 보이잖아요. 이게 기막힌 답인 거예요.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늘에는 별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이 참 놀랍지 않나요? 아브라함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나 자손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그 자손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하늘을 보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참 기가 막힌 분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욱더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해 이런 예를 들어주신 거예요. 그리고 더 감사한 게 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라는 구절이죠.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믿음이었고, 그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이면 충분해”라고 인정하시며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 15장 6절의 한 문장이 나중에 모든 구원의 기초가 되었고, 신학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도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 이야기는 신학의 기초가 여기 있기 때문에 강조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완벽함을 요구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충분하다고 여기시고, 구원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기 위해 질문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너의 그 믿음을 인정하겠고, 그것을 의로 여긴다”라고 응답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약속의 말씀 앞에서 질문이 있다면 하십시오. 믿기 위해서 하십시오. 그리고 그 대답을 듣기 원하세요. 그 대답이 더 확실하게 와닿게 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포인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며 질문을 하죠. “하나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지만, 그 모든 결론이 예배를 통해 화답되어질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15장 9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길, “나를 위하여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지오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재물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많은 재물을 요구하셨을까요?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이 꼭 나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만 요구하시는데 왜 아브라함에게는 다 가져오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이 단순히 약속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키도록 연결시키기 위한 요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번 예배는 그의 자손의 대표로 드리는 것이었으므로 그 자손들이 나중에 드릴 모든 종류의 예배와 제사를 아브라함이 대표해서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요구하신 것이죠. 아브라함은 그것에 순종하여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10절에 보면, 그는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갰고, 작은 새는 통째로 하나님 앞에 드리며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빨리 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바로 응답이 오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설교를 통해 응답을 기다릴 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기다림의 동안에 시련이 오기도 하죠. 우리도 예배를 열심히 드리려고 하지만 시험이 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합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 골프 치기 참 좋은 날씨네요. 그렇지만 우리 가족들과 놀러 가는 게 어때요?
아빠는 말하기를 뭐가 더 중요하냐고 묻더군요. 가족이 중요하지 않냐고 말이에요. 요즘 어떤 설계들이 예배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하려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목사를 보면 짜증이 날 수도 있어요. “저 목사가 왜 저런 틀로만 설교하지?”, “목소리는 왜 항상 똑같지?”라는 생각이 드죠. 하지만 똑같은 목소리를 여러 번 듣게 되더라도 감사할 일이에요. 제가 몸이 아플 때는 목소리가 다르게 나올 때도 있으니 말이에요.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는 1년에 52주 매번 설교를 잘할 수 없다. 네가 서너 번만 잘해도 훌륭한 설교자야.” 하지만 성도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마음에 와닿는 은혜로운 설교를 들으려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몇 주가 지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음성, 그 화답을 들으려면 절대적으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어떻게 하십니까? 먼저 말씀으로 응답해 주세요.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와”라고 하셨죠. 제가 너무 흥분해서 내용을 놓쳤네요. 이제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17절을 보면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과 불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맞는지 고민할 때, 주일 설교를 통해 확답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도 응답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주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질문을 가지고 예배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릴 때 하나님의 응답과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오늘 부를 찬송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여러분, 처음 부르는 찬송이라 따라 부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 가사만 묵상하시면 됩니다. 가사에는 “주님께서는 내 삶의 구석구석을 감찰하시며 나를 응원하십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그러세요.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두려움에 떠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말씀으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질문이 있을 때 괜찮습니다. 믿음을 위해 질문하고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그 모든 것이 결론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의 예배를 받으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생각하며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찬양을 통해 설교가 다시 되새겨지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