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 말씀 요한계시록 19장 1절 함께 읽으시고, 우리 목사님 나오셔서 설교해 주시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아멘.”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죠? 그렇죠. 주일학교에서 요한계시록을 보기 때문에 저희도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 주까지 요한계시록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요한계시록을 생각하면 미래에 일어날 일만을 떠올리지만, 엄밀히 말하면 요한계시록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것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부분도 있거든요.
특별히 오늘은 요한계시록 19장을 보게 되는데, 미래에 일어날 일뿐만 아니라 이 19장을 통해 지금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요한계시록 19장, 우리 삶에 적용하기”입니다. 첫 번째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는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었던 요한계시록 19장 1절에서는 찬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할렐루야의 뜻이 무엇이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할렐루야”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 그리고 가장 큰 방법이 바로 찬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그 기쁨이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찬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사탄이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찬양을 할 때 사탄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장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 사울이 다윗을 창으로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사울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때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다윗이 한 행동이 무엇인가요? 수금을 들고 손으로 탑니다. 다윗이 수금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울이 상쾌해져서 악령이 그를 떠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찬양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사탄을 물리치는 도구가 바로 찬양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슬픔과 좌절 속에서 살아갈 때 주님을 찬양하면 그 상황이 승리로 바뀌게 됩니다.
저는 요즘 6주마다 MRI를 찍습니다. 보통 암에 걸리신 분들은 스캔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제 암은 방사선에 취약하기 때문에 방사선을 이용한 검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PET-CT 대신 MRI를 선택합니다. MRI는 한 시간 반 동안 통 속에 갇혀 있어야 해서 처음에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다음에는 의사에게 부탁해서 마취를 하고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취를 반복하면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서, 이제는 더 이상 마취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통 속에 있는 동안 찬양을 듣기로 했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제가 좋아하는 찬양을 틀어 달라고 요청했더니 병원 기계와 제 기기가 연결되지 않아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계로 음악을 틀어 주었습니다. 비록 가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음악만 들어도 어떤 찬양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찬양을 따라 부르면서 한 시간 반이 금세 지나갔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찬양이 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찬양하는 존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찬양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찬양해야 하며,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찬양하며 사셨습니까? 이사야서 43장 21절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진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내용으로 찬양해야 할까요?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천국의 찬양 모습을 보며 우리도 그러한 내용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송해야 합니다. 1절에서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가 큰 소리로 “할렐루야”라고 외치며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다고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구원, 영광, 능력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우리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신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전능자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보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전능자 되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찬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찬양의 내용이 사탄을 물리쳐 주신 승리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음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이 음녀가 상징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이 구절은 사탄을 심판하시고 물리치신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음녀의 손에 갚음을 하신다는 것은 사탄을 물리쳐 주시고 원수를 갚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원래 사탄에 속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사탄을 물리치고 몰아내시며,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주님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드리는 찬양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6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물의 음성과도 같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은, 큰 우레 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라고 하면서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신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가 하시는 일은 다스리시는 일입니다. 왕이 하는 일이 바로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우리는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연과 온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허다한 음성과 같은 맑은 물소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레 소리도 번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심 때문에 세상이 하루가 지나면 태양이 다시 뜨고, 자연의 식물들이 자라나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를 먹고 짐승들이 자라나죠.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는 그들이 소리를 내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때문에,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찬양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시편 103편 19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에 계시지만 그의 왕권으로 지금도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0장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만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지금도 내 인생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마태복음부터 시작해 신약성경을 보면 찬양에 대해 그렇게 많이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찬양에 대한 내용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면,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찬양에 대한 내용이 가득 차게 됩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찬양에 대해 말씀드렸듯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찬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찬양에 대한 말씀이 넘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가 정말 깨어 있어야 할 초점은 찬양입니다. 우리 가슴이 찬양으로 열려야 하며, 찬양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어서 오십시오”라고 외치며 주님을 맞이하는 자의 가장 큰 준비된 자세는 바로 찬양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며, 이제부터 찬양하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과 힘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겠다고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우리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물의 음성, 많은 물소리와 같은, 큰 우레 소리 같은 소리가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하면서 왕 되신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다음 7절로 넘어가면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의 영광을 돌리세”라고 하며, 왜 우리가 즐거워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어린 양의 혼인식과 신부,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자 우리의 남편이 되시는 분입니다. 남자분들은 이 점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험한 세상에서 든든한 남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는 일입니까? 그렇죠? 몇 분만 고개를 끄덕여 주셔도 그것만으로도 힘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은 ‘또 다른 남편은 필요 없다’라고 할 수도 있겠죠.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내에게 든든한 남편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나의 남편이야, 나도 이런 분이 있어서 좋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남편이 뭘 필요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남편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결혼을 하면 ‘영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결혼 서약에서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의 남편 되신 예수님은 영원한 신랑이십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분, 신랑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을 할 때 내가 ‘결혼하고 싶다’고 해서 결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결혼할 자격이 있어야 하고,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조건을 따져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정도 수준이면 누구와 결혼할 수 있고, 누구와는 결혼할 수 없다’라고 따지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은 ‘내 짝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이 나랑 했나?’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내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우리같이 못난 사람, 우리같이 죄인인 사람, 자주 넘어지는 사람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힌트가 바로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 보면 우리의 신랑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표현합니다. 그분이 어린 양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이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우리를 신부로 삼기 위해, 우리와 결혼하기 위해 주님이 어린 양이 되셔서, 속죄되셔서, 대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결혼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어떤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모든 것이 괜찮았지만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눈썹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화장을 진하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항상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연탄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남편과 연탄을 나르고 있을 때 남편이 깨끗한 타월을 들고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려 했습니다. 아내는 눈썹이 없는 것을 들킬까 봐 걱정했지만, 남편은 눈썹을 빼고 나머지를 닦아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사랑했던 것이죠.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추한 모습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죄인됨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를 신부 삼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요.
우리는 가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신부이기 때문에 난 괜찮다’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정도면 잘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의 부족함을 여지없이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또 반대로 ‘하나님, 왜 저 같은 사람을 목사로 삼으셨습니까?’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성령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네가 부족한 걸 다 알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다 알아.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용하고 싶어’라고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용기를 내어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이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를 신부 삼아 주신 것을 은혜로 여긴다면, 자연스럽게 물어봐야 합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주를 위해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해야겠죠.
그에 대한 답변이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8절에 보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착한 행실을 입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인됨을 알고 계십니다.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죄인된 모습으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점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가잖아요. 그런 것처럼, 주님의 신부된 우리는 주님과 늘 교제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격도 없고 늘 넘어집니다.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 호세아서에 나옵니다. 호세아서에는 고멜이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호세아는 싫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니까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매일 외박을 하고, 바람을 피우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들이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서 다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멜이 노예로 팔려갈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녀를 데려오라고 하셨고, 호세아는 “나만 사랑할 수 없겠니?”라는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멜처럼 다 잘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고멜 같은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언제 바람을 피웠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두고 돈을 사랑하며 돈과 바람을 피운 적이 있고, 명예와 바람을 피운 적도 있으며, 세상의 쾌락과 바람을 피운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와서 늘 하시는 말씀이 “나만 사랑할 수 없겠니?”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신부된 우리에게 “너, 나만 사랑할 수 없겠니?”라고 물어보십니다.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고멜처럼 변화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완전히 변화하겠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바람을 피우다 주님 앞에 돌아가고, 또 바람을 피우다 주님 앞에 돌아가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길 원합니다. 내 자녀보다, 내 남편보다, 내 아내보다, 내 직장보다, 돈보다 하나님만 사랑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자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배우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물질이나 이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관리하는, 그런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해 달라는 고백이 신랑 되신 우리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원합니다.
세 번째는 장수 되신 백마 타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보면,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백마 타신 예수님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승리케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2절에 보면 그분의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이 있다고 나옵니다. 이는 많은 나라를 정복하셨고, 많은 왕들을 무너뜨리셨다는 뜻입니다.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름을 쓴 것이 하나 있으나 그 이름을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분은 피 묻은 옷을 입고 계십니다. 전쟁터에서 싸워 이기셨다는 증거입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고 승리하고 오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떠올릴 때, 어떤 이미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는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이 우리의 이미지였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을 백마 타신 장수로, 나를 위해 싸우시는 주님으로 이미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인생은 바뀝니다. 우리 인생은 힘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화요일에 큐티 세미나 할 때, 제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백마 타시고 내 앞에서 미리 싸워주시는 주님으로 이미지화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백마 타신 예수님입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저는 먼저 리액트를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싸워주시겠지”라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영락교회에서 22년 동안 목회하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겠지만, 모든 문제 앞에서 제가 공통적으로 했던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보면서 답답해했을 것입니다. “아니, 담임 목사가 뭘 해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항상 지켜봤습니다.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제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해결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락교회를 사랑하시나 봐.” 하나님이 하신 것이 보이니까,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저를 보면서 답답할 수 있겠지만, 그 행동의 동기가 바로 이 이미지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어떤 시험이 내 앞에 있든지 간에, 내 앞에서 미리 싸워주시는 백마 타신 승리케 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아프고 나서 이 이미지를 잊고 살았습니다. 아프고 나서 말씀을 보면서, “아, 내가 이 모습을 잊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프고 나서 저도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로 승리케 하시고, 내 앞에서 미리 싸워주시며, 모든 것을 다 싸우신 후에 “이제 네가 테이크오버 하라”라고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인데, 내가 잊고 살았구나. 그래서 다시 한번 주님을 믿고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찬송가 440장을 보면, 우리가 아까 불렀던 찬송가 440장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의 장애를 두려워 말아라” 왜냐하면 바로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우리들이 되길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다시 한번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이제부터 찬양 안 하고는 못 살게 해주세요. 찬양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되게 해주세요.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라는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늘 동행하시는 신랑 되신 주님, 나의 남편 되신 주님, 그 사랑 때문에, 그 어린 양의 사랑 때문에, 내가 이제는 주님을 닮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늘 내 앞에는 장수 되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먼저 싸워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확신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 장수 되신 예수님이 우리로 승리케 하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더 담대히 나아가서 싸우고, 더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주를 위해 나아가는, 그런 우리가 되어, 우리의 입술에는 늘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양, 승리의 찬양이 넘쳐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