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시는 말씀 함께 읽었으면 좋겠는데요 요한계시록 5장 4절, 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아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걸쳐 전하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이 4장과 5장에서 경험하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부터 3장까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3장까지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바로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상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중 칭찬받은 교회는 몇 교회일까요? 두 교회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다섯 교회는 야단을 맞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였다, 세상과 타협한다, 능력이 없고 형식주의에 빠져 있다, 미지근하다 등으로 꾸중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착각하는 이러한 교회들을 향해, 요한계시록 1장에서부터 3장까지는 야단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이 어땠을까요? 지금 교회들이 야단을 맞고 있지만, 그 교회들은 굉장히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순교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고 교회들이 핍박을 받는 상황 속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며 야단을 치십니다. 교회 지도자로서 사도 요한은 아마 굉장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어쩌지? 어떡하지?’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하는 교회들을 보며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장 1절의 시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라는 말씀을 받았을 때, 굉장히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실까’ 하고 요한계시록 말씀을 봤는데, 그 내용이 야단에 관한 것이니 얼마나 실망되고 마음이 아팠을까요.
사도 요한의 마음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부분 중 하나가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실 때, ‘그래도 이제 희망이 있겠다’라고 생각했는데, 4절에서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늘에 올라간 상태입니다. 천국에 있는 상태인데 거기서 울었습니다. 아마 천국에서 처음으로 운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거든요. 그런데 사도 요한은 슬퍼서 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루마리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두루마리에서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어떤 답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두루마리가 열리지 않자, 그 아픔에 슬퍼하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4장에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 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처음에 들은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며 하늘문이 열립니다. 사도 요한은 4장에서 모든 것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교회를 바라보면 답답한 부분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에 와도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라 해도 시험받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런 불완전한 교회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얻게 되는 장면이 바로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부족한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회는 부족할지 몰라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힘 있게 일어설 수 있을까요?
첫째로, 열림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4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며 하늘문이 열리고, 사도 요한이 그것을 보게 되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경험한 것은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본 사람들 중에 또 누가 있습니까? 스데반 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를 앞두고, 사도행전 7장 55절에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느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본문으로 설교를 들으신 기억이 있으신 분도 있겠지만, 보통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데,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앞두고 예수님이 일어서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늘문이 열리면서 스데반 집사님은 그 광경을 보고, 그것을 경험하면서 힘을 얻게 됩니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하늘문이 열린 것을 체험하면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늘문이 열린 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4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면, 사도 요한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문이 열리기 전에 사도 요한은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실제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하늘문이 열릴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늘문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늘이 열리고 요한이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천국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늘문이 열리며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고, 나중에 천국에 가면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다는 것은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으로 해석하며 하나님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델마 톰슨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매일 이사를 다녔고, 종종 오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오지에서는 지저분하고, 사람들도 마음에 들지 않으며, 음식 냄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에게 불평이 가득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짧은 답장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사나이가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한 사나이는 하늘을 쳐다보며 기뻐하고 있었고, 한 사나이는 냄새나고 더러운 시궁창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너는 어떠하냐?” 이 편지를 통해 델마 톰슨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아, 내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구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구나”라며 하나님으로 자기가 있는 세상을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가르치며, 오지에 갈수록 할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녀는 그 오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바라보는 교회들이 부족하고 연약하며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으로 해석하며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할 일을 주신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에 가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4장 2절에 보면,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어 보니 하늘에 보좌가 베풀어져 있고,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보좌에 누가 앉아 계십니까? 하나님이 앉아 계십니다. 사도 요한이 본 하나님은 “벽옥과 홍보석 같고, 무지개가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요한이 본 하나님은 보석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 광채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사도 요한처럼 그 광채를 보지는 못할지라도, 내 삶 속에서 지금도 역사하시며 나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사도 요한은 어디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두루마리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요한계시록 5장 2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두루마리에 답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열리지 않자 울었습니다. 맞습니다.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고, 힘든 세상에서도 힘을 얻어 일어설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처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힘을 얻어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배에 답이 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배가 답입니다. 예배가 답입니다.
예전에 어느 청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왜 교회를 안 나가냐면 교회는 너무 추상적인 말만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이 없는 것 같고, 추상적입니다. 매일 기도만 하라고 하고, 예배드리라고 하는데, 그게 우리 삶에 어떤 현실적인 답을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결심한 게 있습니다. ‘나는 목회하면서 설교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에 얼마나 현실적이고 적용이 되는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지’라는 결단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주에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틀 동안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악몽의 내용은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고 설교를 했더니, 우리 성도들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열릴 날만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럼 그것은 진짜 추상적인 것이 되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내용을 이틀 동안이나 악몽 속에서 몇 시간씩 꿈꾸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까? 우리 삶에 적용되는 이 말씀을 제대로 적용하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고 이해하며, 경험하고 간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 걱정을 많이 했나 봅니다. 이틀 동안이나 그런 꿈을 꾼 걸 보니 말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영화 가드파더를 보신 분들은 계시겠지만,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 마피아 두목의 아내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하냐면,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라고 끝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기도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하지만 여러분들, 기도밖에 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말 기도밖에 답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뭐냐면, 영적인 것이 해결되어야 현실적인 것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라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배는 뭐냐 하면, 그냥 의미는 없지만 신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의식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의식을 치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뭐냐 하면, 지금도 살아계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만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이 시간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힘을 얻고, 이 힘을 얻어서 세상에 나가 승리하게 되는 원동력이 바로 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답이 있다는 것이죠.
요한계시록 4장 8절을 보면, 예배의 장면이 나옵니다. “내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예배를 바라보는 눈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찬양을 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로다.”
여러분, 우리가 ‘거룩하다’라는 이 찬양이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부르는 찬양이 아닙니다. ‘거룩’이라는 원뜻은 ‘구별되다’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오직 한 분 되시는 그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하며,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오직 한 분, 다른 것과 절대로 구분되어야 하는 오직 그분만 받으셔야 하는 이 찬양을 우리가 드립니다 하며,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려드리는 장면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입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영광을 올려드리고, 존귀를 올려드리고, 감사를 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천국의 예배를 보면서, 우리의 예배를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우리가 정말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고 싶은 소원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경배하며, 한 행동이 뭐냐면 면류관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면류관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립니다. 돌려드리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여기서 이 관이 면류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 앞에 돌려드릴까요? 여러분, 천국에 가면 다 똑같지만 사이즈가 다른 게 있습니다. 뭐가 다를까요? 면류관의 사이즈는 다릅니다. 면류관의 사이즈가 다릅니다. 그런데 다른 사이즈지만, 하나님 앞에 돌려드림으로써 이제는 다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다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이 관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첫째는 허영심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배를 가장 크게 방해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만 포커스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시선을 흔들리게 만드는 게 허영심입니다. 허영심이란 것은 비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최고로 알고, 감사하며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쟤는 나보다 예쁘네, 쟤는 나보다 잘났네, 저 사람의 입은 옷은 나보다 좋은 옷이네, 저 사람의 차는 나보다 좋은 차네, 왜 나는 저런 것이 없지?’ 하나님, 왜 나에게는 이런 것이 없을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게 허영심입니다. 우리의 포커스가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나와야 하는데, 우리의 생각이 흐트러져 나의 욕심과 이런 모든 생각들이 뒤죽박죽 되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왔다가 오히려 시험에 들고, 불평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요한계시록의 장로들은 그런 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 올려놓는 것,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허영심이라는 것은 다 던져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만 높임을 받으소서 하는 그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장면이 바로 면류관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또, 이 면류관을 드린다는 것은 뭐냐면, 이 면류관은 왕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왕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포인트를 써놨으니 거기 좀 참고해 주세요. 일부 예배하고 나니 시간이 모자라서 확확 뛰어넘었는데, 첫 번째 포인트는 허영심입니다. 두 번째 포인트는 하나님만이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벌써 12시 3분이네요. 제 이야기를 확 뛰어넘어 가겠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 저는 왕관 쓸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주권자 되
시고,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만이 나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며,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인정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면류관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의미가 이 안에 다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이 천국의 예배를 보면서, 이 예배를 바라보면서, 바른 예배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인트는 면류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째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제대로 된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아까 읽은 요한계시록 4장 8절을 보면, “내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합니다.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로다”라고 찬양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진정으로 찬양하는 이 모습, 우리의 예배 속에 이러한 찬양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신경 끝나고 우리가 찬송을 불렀잖아요. 몇 절까지 있는 찬송인지 아세요? 이걸 기억을 너무 잘하면 안 좋은 겁니다. 그 이유는 ‘뭐 이렇게 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네, 제가 그랬습니다. 오늘 찬송을 한참 불렀는데, 아직도 안 끝났더라고요. 그래서 6절까지 있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진정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이 찬양을 지겨워했던 제가 죄송합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조차도 하나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나의 찬양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찬양은 정말로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만 높임 받으시는 찬양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요한계시록 4장 10절에서 24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경배하며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왕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모습입니다. 예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부터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순종의 결단이 있는 예배가 바른 예배이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세 번째로, 바른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아까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드렸다고 했죠. 이것은 내가 받아야 하는 면류관인 영광인데, “하나님, 이것도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영광 받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면류관의 세 번째 의미입니다. 답을 쓸 때, 이 질문에 답을 쓸 때 세 번째로 쓰시면 됩니다.
첫 번째는 허영심, 두 번째는 하나님만이 왕으로 인정받는 것, 세 번째는 바른 예배의 모습이기도 하고 면류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세요.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세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혹시 내가 드러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물론 제가 목사로서 제일 많이 생각해야겠지요.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 영광보다는 제가 생각이 난다면 제가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도록 우리의 모든 포커스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찬양이 나오고, 말씀 앞에 순종이 나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면 세상이 어떠하든 우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교회가 어떠하든 우리는 힘을 얻고 세상에 나가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길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결론 짓겠습니다. 세상은 때로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하물며 초대교회조차 그랬다면, 요즘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그렇지만 교회를 바라보면서 실망할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을 향하길 원합니다. 하늘을 향하며 지금도 내 삶에 역사하시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그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가 힘을 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며, 진정한 바른 찬양과 말씀 앞에 순종의 결단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며, 힘을 얻고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