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구절인 30절과 31절 두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봉독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아멘.

오늘은 드디어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입니다. 사도행전의 뜻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의 원어를 보면 ‘프락시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사도행전 하면 사도들의 행동이나 행적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영어로 보면 그냥 ‘액츠(ACTS)’라고 되어 있어요. 원어의 ‘프락시스’라는 단어는 ‘행동’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아무 행동이나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유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은 성도들이 마땅히 행동해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나도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인 오늘 본문을 보면서, 뭔가 끝맺지 못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 책이나 이야기에서는 어떤 인물이 등장하면, 그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죽었는지까지 다루어야 이야기가 끝난 것 같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뒷부분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에 대해 한참 배웠습니다. 그의 순교까지 나오면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도행전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굉장히 특이하게 끝납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하게 끝나요. 30절에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로 끝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은 현재 진행형으로 끝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있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죠. 왜 사도행전이 이렇게 끝날까요? 사도 바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있는 상태로 끝나는 이유는 사도행전의 의미를 우리에게 더 잘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그 바통을 사도행전을 읽는 우리에게 넘겨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는 우리에게도 ‘나처럼, 우리처럼, 바로 그런 삶을 살아라’고 요청하는 의미로 사도행전이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원래는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 “우리의 행전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러한 행동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자세, 즉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나의 행전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행전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 교회의 표어가 ‘선교적 교회’인데, 선교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가진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제대로 나의 행전을 주님 앞에 써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 마음은 확실한 은혜의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난주 설교 때 사도 바울이 풍랑을 만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도 바울이 풍랑을 만나 배가 제멋대로 떠내려가고, 마침내 목숨만 부지한 채 한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속으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으면 풍랑을 만나 모든 것을 잃고 우리 섬에 오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에게 또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비가 오고 날이 추워지자, 원주민들은 불을 피워 이들을 맞이합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솔선수범하여 나무 한 묶음을 가져다가 불에 넣습니다. 그런데 그 불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워서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안 그래도 죄 때문에 풍랑을 만났다고 생각했던 섬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 살인자인가?”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 이유를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냥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뿐입니다. 독사는 뜨거운 불 속에서 나와 바울을 물었고, 바울은 독사를 불에 떨어버리고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섬 사람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이렇게 이분법적입니다. 이 사람은 큰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대단한 위인인가? 세상의 해석은 죄와 공로, 잘못과 대가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개념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야 합니다. 은혜의 개념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후로 우리의 죄는 다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누구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송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이 은혜입니다. 그는 은혜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은혜 때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른 동기이고, 제대로 된 동기입니다. 그렇게 은혜 속에 살다 보니, 모든 삶의 상황을 은혜의 개념으로 해석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우리는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너의 죄 때문에 병이 걸린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종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 속에, 하나님의 나라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속에 살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그것을 바라보며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나라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리로 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함께 살자”라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좋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쁨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동기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는 ‘빚진 자의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사도행전 28장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면 어디를 보면 될까요? 성경책을 봐야겠죠.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로마서를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생각하며 쓴 책이 바로 로마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로마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빚진 자’라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빚진 자’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로마서에만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며 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마서 1장과 8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서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빚졌다고 말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빚졌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2절에서는 빚진 자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 빚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빚졌기 때문에 육신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빚을 지고, 또 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진 자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빚진 자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아세요? 세상에서 죄를 짓는 흉악범들은 처음에는 ‘내가 안 그랬어’ 하다가, 나중에 확실해지면 누구 탓을 할까요? 세상 탓을 합니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죠. 그래서 범죄학자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 중 하나로, ‘세상이 나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나는 이래도 된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고 분석합니다. 만약 내가 세상에 빚졌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지만, 세상이 나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면 나는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심리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 백화점들이 갑자기 파산하거나 망하는 경우가 많죠? 그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누가 가장 많이 훔쳐갈까요? 손님들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훔쳐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물건을 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사장은 나보다 더 많이 벌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좀 훔쳐간다고 해서 우리 백화점이 망하지는 않을 거야’, ‘무엇보다도 나는 일한 만큼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어’라는 생각이 그들 마음에 깔려 있습니다. ‘내가 백화점을 위해 이렇게 일했는데 백화점은 나에게 그만큼 대우하지 않았어. 그러니 백화점이 나에게 빚을 졌어’라는 생각이 도둑질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백화점이 나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니 죄를 저지르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빚진 자라고 생각하면, 빚졌기 때문에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빚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저 사람이 나에게 빚졌다’ 혹은 ‘저 단체가 나에게 빚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나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고, 너도 나에게 빚지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이기적이고 깍쟁이 같은 스타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무엇을 해줘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빚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찬송가에도 ‘내가 공을 세우지 못하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83년도에 미국으로 관광 비자로 들어왔어요. 관광 비자로 들어와서 영주권을 받기까지 오래 걸렸죠. 저는 65년생이니까, 한국에서 18년 동안 살았고요, 그 이후로 미국에서 훨씬 더 오래 살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한국과 미국의 운동 시합에서 항상 한국을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배은망덕한 사람인 거죠. 그렇지 않나요?

미국에 살면서도 저는 늘 이곳을 남의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손님으로 와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미국에 대한 고마움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미국이 고맙더라고요. 미국이 저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고, 물론 잘하진 못하지만 영어를 배우게 해주었어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도 고맙죠. 물론 제가 내 돈 내고 다녔지만, 그래도 기회를 준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 나라에서 먹고 살고 있고, 아이도 낳았어요.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이런 기특한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미국에 빚진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미국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내가 미국을 위해서, 이 땅을 위해서 뭘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하기만 했거든요.

여러분들은 이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신가요? 직장 생활하시는 분들도 있으시죠? 직장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가깝지만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로요. 그 이유는 내가 고용주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다니는 직장에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직장이 나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만족스럽고, 직장 생활이 해피하지 않은 거예요. 고용주나 상사가 짜증스러운 이유도, ‘나는 이만큼 했는데, 너는 나에게 그만큼 해주지 않았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빚진 자의 마음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일이 힘들게 느껴지는 거예요. 생각해볼 필요 있지 않나요?

어느 아버지 학교에서, 어떤 목사님의 아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제 아버지는 목사님으로는 100점인데, 아버지로는 빵점이에요.”라고요. 그걸 보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구나’ 싶었어요. 어떻게 빵점일 수 있나요? 우리는 사람에게 점수를 줄 때 너무 야박한 것 같아요. 어떻게 아버지에게 빵점이겠어요? 아버지 때문에 밥은 먹었을 거고, 학교도 다녔을 텐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 때문에 태어났잖아요. 그런데 그걸 빵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고 힘들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나아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빚진 거거든요. 우리가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부모님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자녀는 부모에게 잘해요. 하지만 부모를 보면서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게 뭐 있냐’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인생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그 관계를 무너뜨리며, 결코 행복하지 않아요. 자기 인생 자체가 행복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빚진 자’라는 마음이 중요한 거예요.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비록 내 아내가 신사임당 같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 같은 사람과 함께 살아주잖아요. 나에게 밥도 해주고, 어떤 분은 밥도 자기가 한다지만, 나에게 빨래도 해주고. 저희 와이프는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줘요.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식을 낳고 키워주고요. 여러분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서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 때, 그 가정은 아름다워요.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있고, 뭔가 서로를 위해 해주려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매일 나만 희생해.” 이렇게 사는 가정은 절대 행복할 수 없어요. 제가 목회하면서 항상 그러거든요. “결혼했으면 You are stuck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그러면서 제가 하는 얘기가, “내 신랑이, 내 신부가 완벽하기를 바라지 말라.”입니다. 여러분들, 완벽했으면 혼자 살았겠죠. 결혼 왜 합니까? 내가 완벽한데 왜 결혼해요? 내가 부족하니까 결혼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도 왜 나에게 짝을 허락하셨을까요? 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짝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빚진 자예요.

여러분들,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면서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빚진 자의 마음으로 말이에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빚진 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세요. 거기 18장 23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왔다.”고 했어요. 이 종이 왕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어요. 만 달란트라고 하면, 자기 목숨을 다 바치고, 식구들이 일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제대로 된 성도들이죠. 그런데 내가 주님 앞에 그런 빚을 졌는데,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세요. 이웃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세요. 그 사명을 받은 그 순간부터,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빚진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빚을 졌는데,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내가 당신들에게 빚진 사람입니다.”라고 당연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들이 매를 치고, 돌을 던지고,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당신들에게 빚진 사람입니다. 당신들 천국 가야 돼요.”라는 마음이 바로 빚진 자의 마음 때문에 나온 거예요.

저는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알기 원해요.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빚진 자 맞습니다. 맞아요. 제가 아프면서 더 느껴요. 저는 우리 영락의 성도들에게 빚진 자예요. 빚진 자 맞아요. 어떻게 보면 목사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여러분의 은혜로, 여러분의 긍휼하심으로 제가 영락교회에서 지금 사역을 하고 있는 거예요. 빚진 자 맞아요. 아프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미국이 사랑스러워요. 아까 얘기했죠? “아, 내가 미국의 빚진 자 맞구나.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빚진 사람 맞구나. 내가 우리 와이프에게 빚진 자구나. 내가 우리 아이들한테 빚진 자구나.”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이 마음이 드니까, 내가 빚진 자라는 걸 알게 되니까, 때로는 아플 때 치료받는 게 힘들잖아요. 원망이 올라오려고 할 때, “그래, 나는 빚진 자잖아. 하나님 앞에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진 자인데, 내가 감히 어떻게 원망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저를 붙잡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내가 어떻게 원망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죠. 바로 이 두 가지 개념, 은혜와 빚진 자라는 마음이 흔들리려 하는 제 마음을 붙잡아 주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주를 위해 일어나야지.”라는 마음이 생겨요. 저는 여러분들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나의 행전을 써 내려가야 해요.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의 중심이 바로 서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인과응보적으로 해석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은혜 속에 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은혜 속에 사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나라 속에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사는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행복하길 원하고, 저 사람도 복 받았으면 좋겠고, 저 사람도 예수 믿었으면 좋겠고, 바로 빚진 자의 마음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해요. 그렇게 아름다운 나의 행전을 써 내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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