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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27장 말씀입니다. 읽기는 20절입니다. 우리 함께 소리 내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아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7장은 AD 59년 정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로마로 향해 갑니다.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하거든요. 그런데 죄수의 몸으로 로마 군인 백부장의 인도하에 적어도 로마 군인 100명이 그 외에 있었겠죠. 그 백부장의 인도하에 이제 로마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바로 가지는 못해요. 왜냐하면 폭풍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항상 해안을 따라서 갑니다. 그래서 먼저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이 배는 군함이 아니에요. 일반 상선 같은 배예요. 그 배에는 상인들도 있었고 군인들도 있었고, 그 외에도 죄수들도 있었고 일반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런 여러 사람이 배를 탑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도 바울과 함께 사도 바울의 동역자도 함께 타고 있었어요. 2절에 보면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는데 아드라뭇데노에서 우리가 올라 항해할 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누구죠? 여기 보면 나오는데, 누구예요?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같이 고통을 겪었던 동역자예요. 그런데 구절에 보면 사도 바울 외에도 다른 동행자가 있어요. 계속해서 읽어보면 또 한 사람이 더 같이 동행합니다. 누굴까요? 그 아드라뭇데노는 배 이름이고요. 힌트는 ‘우리’라는 표현이에요. 누가 ‘우리’라고 썼을까요? 이 책을 쓴 사람이 함께 갔겠죠. 사도행전을 쓴 사람, 누가가 이 배에 같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자기가 직접 체험한 것을 여기다 다 써놓은 거예요. 누가는 의사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건강을 챙기려고 함께 갔어요. 그리고 그 배에는 아무나 탈 수 있으니까 사도 바울을 돌보기 위해 두 명의 동역자가 함께 이 배를 타고 갑니다.

성경을 보면, 구절에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항해하기 위험한지라.” 이 배가 로마로 향해 가야 하는데, 사도 바울이 말립니다. “우리 여기서 머물자. 다른 항구로 가지 말자. 지금은 폭풍이 있는 시기기 때문에 가지 말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사도 바울이 금식해 보고 한 말이다.”라고 하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라 시간을 얘기하는 거예요. 금식하는 절기는 지금으로 하면 9월 말이에요. 9월 말이면 지중해 날씨는 가을이 되게 짧아요. 그리고 바로 겨울이 옵니다. 그러니까 9월 말이라는 것은 가을의 끝입니다. 그런데 겨울철에는 지중해에서는 배가 항해를 안 해요. 그 당시에는 풍랑을 만나면 바로 뒤집히기 때문에 항해를 안 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행위를 다 돌아본 경험상 “이건 풍랑을 만날 때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선장과 선주들은 자기 경험상 괜찮다고 하면서 출항을 강행해요. 아니나다를까 폭풍을 만납니다.

폭풍을 만나서 정말 심각하게 짐을 다 버리게 돼요. 여러분, 왜 짐을 버릴까요? 배가 가벼워져야 되니까요. 17절에 보면 재미있는 단어가 나와요.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스르디스가 뭐예요? 처음 보는 단어죠. 스르디스는 모래탑이에요. 모래탑은 뭐냐면, 폭풍이 불면 바다 속도 땅이 뒤집혀서 모래가 갑자기 쌓여 산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물과 산을 이루면 갑자기 물과 땅 사이가 얕아지는 곳이 생겨서 배가 큰 배가 그 위에 올라서면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고 그냥 그 자리에 고립되는 거예요. 그래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을 버리는 거예요.

처음에는 17절에 연장을 내리고 도구들을 다 버려요. 그리고는 18절에 짐을 바다에 다 버려요. 상인들은 자기 물건을 버리면서 얼마나 아까웠을까요? 자기가 이걸 가지고 이윤을 얻어야 하는데 다 버려요. 그리고는 사흘째 되는 날 19절에 보니까 “사흘째 되는 날은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버리더라.” 배의 기구는 뭐예요? 노를 저어야 하잖아요. 그것도 다 버려요. 이제는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가 없어요. 다 버렸기 때문에 이들의 상황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20절에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계속되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이들의 상황이 소망이 없는 상태, 구원의 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가 있어요. 그리고 심한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 구원의 여망이 없는, 소망이 없는, 희망이 없는 그러한 상황 속에 처할 때가 있어요. 어쩔 때는 건강 때문에, 어쩔 때는 부부 관계 때문에, 어쩔 때는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어쩔 때는 사업이 흔들리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 때문에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인생의 풍랑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인생의 풍랑 속에서 해야 하는 게 뭐냐면, 첫째는 “왜?”라는 질문을 꼭 해보시길 바랍니다. “왜 나에게 이런 풍랑이 있는 것일까?” 여러분, 솔직히 사도 바울도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죠. 보세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한 가지 사명을 받고 지금 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사도행전 23장 11절에 보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본문 가지고 설교한 거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지만, 사도 바울은 아마 “나 여기서 죽었구나.” 생각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사도 바울아, 두려워하지 마. 너 여기서 안 죽어. 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니까 안 죽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이 생각만 하고 로마로 향해 가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아마 “로마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면 되는데 왜 이 폭풍을 만날까?” 생각했을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런 질문을 했겠죠. “하나님, 왜 이 풍랑을 나에게 허락하십니까?”

여러분, 솔직히 이 “왜?”라는 질문은 굉장히 무서운 질문이에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게 만드는 게 “왜?”라는 질문이에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내 스스로가 잘못된 결론을 내리면 신앙을 떠날 수도 있는 무서운 질문이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교회가 “왜?”라는 질문을 막은 적도 있어요. 칼 융이라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의 아버지가 루터교 목사님이었어요. 그런데 이 아들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아빠, 일체가 뭐야? 이해가 안 가는데 설명 좀 해줘.” 목사인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냐면 “야, 그런 질문 하지 말고 그냥 믿어, 그냥 믿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도 칼 융은 똑똑했어요.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지적인 탐구를 막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기독교를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목사인데도 말이죠. 그는 세상의 학문으로 가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어요. “왜”라는 질문이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에서도 기독교가 한창일 때 사람들이 “왜”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대답을 했어요. “그런 질문 던지지 말고 믿어.” 사람들에게 성경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도 “왜”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기 스스로도 답이 없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런 세상 속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칼 융의 아버지도 “왜”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 대답도 몰랐을 겁니다.

여러분들, 그런데 세상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죠. 세상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해 줘야 합니다. 자녀에게도 그렇지만 세상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도 “왜”라는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왜 하나님, 나에게 이 풍랑을 허락하십니까? 왜 이 풍랑이 나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왜 사도 바울에게 이 풍랑이 필요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풍랑 속에서는 솔직히 답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바로 대답이 없었어요. 하나님은 대답을 안 해주셨어요.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우리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 왜 내가 이 풍랑 속에서 고생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질 때 바로 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왜”라는 질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 왜?”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왜 하나님, 그때 그 풍랑을 허락하셨어요?”라고 질문했을 때 어느 한 순간 여러분은 깨닫게 돼요. 뭘 깨닫게 되냐면 하나님의 섭리가 거기에 있었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거기에 있었구나,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분명히 있었구나를 보게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에요. 그때 “왜”라는 질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언제 이걸 깨달았을까요? 사도 바울이 탄 배에는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 아세요? 사도행전 27장 37절에 보면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276명입니다. 그런데 이 배에 탔던 사람이 한 명도 안 죽었어요. 원래는 백부장이 배에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누구를 죽이려고 했을까요? 배에 있는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어요. 혹시라도 죄수들이 살아나고 자기들은 죽을까 봐, 그리고 자기들이 살아나도 죄수들이 도망가 버리면 자기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니까 죄수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나서서 얘기했거든요. “여기서 한 명이라도 죽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276명 다 살 거야.”라고 얘기해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한 명도 안 죽였습니다. 그리고 로마까지 276명이 다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그 276명이 로마까지 가서 제일 먼저 육지에 나서 만나는 사람에게 누구에 대한 얘기를 했을까요? 누구에 대한 얘기를 했을까요? “야, 우리 배에 사도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탔어. 이 사람이 한 말이 다 이루어졌어요. 대단하지 않니?” 이런 소문이 퍼졌을까요? 안 퍼졌을까요? 이 배에 몇 명의 군인이 탔다고요? 100명의 로마 군인이 탔어요. 이 얘기가 누구에게 전달되었을까요? 황제까지 전달되겠죠. 황제를 만날 수 있었겠죠. 그 소문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솔직히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형편이 안 됐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죄수였기 때문에 갇혀 있어야 했어요. 사도 바울은 그래도 감옥에는 갇혀 있지 않았지만 가택 연금이 돼 있어서 집에 갇혀 있었어요. 로마 군인이 지키는 상황 속에서 집에 갇혀 있었죠. 그런데 어떻게 복음을 전해요? 전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됐냐면,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집으로 찾아온 거예요.

사도행전 28장 21절부터 보면 찾아온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유대에서 내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내게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하거나 이야기한 일도 없소.” 그런데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를 듣고자 하니.” 완전 사도 바울에 대해서 백지 상태인 사람들이 찾아온 겁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찾아왔겠어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이 파에 대하여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그런데 “어디서 들으니 이게 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너가 하나님 사람이니까 한번 들어보자.” 해서 23절에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면 예약제로 했을까요? 날짜를 정하고 예약제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갇힌 신세가 됐지만 이 사건 때문에 소문이 퍼진 거예요. 이미 기독교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있었어요. 안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소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사람한테는 가서 들어봐야겠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오히려 사도 바울을 찾아오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해요?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한 겁니다. 아침만이 아니에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한 자리에서 설교한 거예요. 설교하고 나면 가고, 설교하고 나면 가고. 그래서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풍랑을 허락하셨는지 알겠죠?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솔직히 사도 바울은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내가 로마로 가면 죄수의 타이틀이 벗겨져서 이제는 내가 로마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리라.”고 사도 바울 혼자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달랐어요. 하나님의 지혜는 이 풍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복음을 듣도록 만들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 보면 왜 풍랑을 허락하셨는지 알게 되는 것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왜 하나님?”이라고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지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선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믿기 위해서 그리고 간증하기 위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두 번째는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늘 말씀을 쫓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늘 말씀을 쫓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 사도 바울은 풍랑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할 수 있었어요. 그 이유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죠.

여러분들, 어떤 면에서 이 시대는 풍랑을 만난 배와 같아요. 풍랑을 만난 배와 같아요. 그리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 자기가 잘난 줄 알아요.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풍랑이 임하고 난리가 났을 땐 모두가 다 조용해져요. 모두가 다 조용해져요. 처음에는 배가 떠났을 때는 순풍이니까 자기가 잘난 줄 알아요. “저 사람 말 안 듣길 잘했지.” 그런데 풍랑이 만나고 다 버리고 이제는 할 말도 없어요. 무슨 말을 하겠어요. 자기가 잘났다고 모인 그 배 탄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말이 없어요. 구원의 여망이 없어요. 소망이 없어졌어요. 난리 치는 사람도 없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말할 기운도 없어요. 그런데 그때 사도 바울이 일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21절에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음에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 그대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다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게 비꼬는 투가 아니에요. 이 얘기를 먼저 한 이유는 자신이 하는 말에 신뢰를 쌓기 위해서예요.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얘기하죠.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여러분들,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 이런 소리가 들리잖아요? 그럼 그게 안심이 되는 거 아세요? 안심이 돼요. 이게 안심이 될까 하지만 저는 안심이 되더라고요. 누군가 저에게 와서 믿음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그럼 안심이 되더라고요. 예전엔 몰랐는데 안심이 되더라고요. 아마 이들도 그 풍랑 속에서 그걸 느꼈을 거예요. 아무 할 말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데 누군가가 일어나서 갑자기 “안심하라. 그리고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고 오직 배뿐이니라.” 우리는 살았구나. 우리는 살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소망을 갖기 시작하죠.

그러면서 24절에 바울이 왜 이런 얘기를 하게 되는지를 얘기를 해요. 23절에 “내가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사자가 말하기를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 안심하십시오. 그러면서 25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그 이유는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에게 말씀 주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심하십시오.

여러분들, 솔직히 자기가 잘나고 그렇게 시끄럽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돼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거예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어쩔 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전하는 그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극심한 풍랑을 맞이하기도 하세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는 사도 바울을 따르게 되죠.

그런데 여러분들, 솔직히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별하기 이게 쉽지가 않아요. 쉽지는 않아요. 제가 목사지만 항상 가장 조심하는 게 뭐냐면 “이게 하나님이 저에게 우리에게 전달하기 원하는 말씀이 맞아요?” 이 질문을 되게 많이 해요. 많이 해요. 교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거든요.

어떤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갑자기 목사님을 찾아왔어요. “목사님, 제가 목회자가 돼야 하나 봐요.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부르셨어요.”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왜 그렇게 얘기하냐?” 그랬더니 “어제 제가 하늘을 봤는데 하늘의 구름이 PC라고 써 있었어요. 저건 분명히 제가 볼 때는 ‘preach Christ’예요.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내 생각에는 ‘plant corn’ 거 같은데.” 누가 맞을까요? 누가 맞을까요? “plant corn.” 콘을 심어라. 농사하는 사람이니까.

여러분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라고 생각하지만 아닐 때도 되게 많아요. 착각할 때도 있어요.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예요. 자기가 이스라엘의 리더로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겠어요. 그런데 보니까 자기가 살인자가 되고 이제 자기가 죽을 거 같아서 도망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40년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잖아요. “그게 아니었나?” 40년 동안 그러고 살았을 거예요. 다윗 같은 경우에도 보면 왕이 돼서 하나님의 법궤를 이제는 모셔오고 싶었잖아요. 그래서 빨리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법궤를 가져오던 사람이 죽어버려요. 왜 법궤만 가지고 죽어버려요. 다윗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하나님 뜻이 아니었나?”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그래요. 여러분들, 모든 일이 선하다고 해서, 선한 동기가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늘 생각해야 돼요. 그러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가는 방법을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쫓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어야 돼요. 나에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이거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로 내가 결정했어.”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심에 대한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이런 것들이 연결이 되고 확신이 되어져야 돼요. 확신이 되어져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두 번째로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욕심을 경계해야 돼요. 야고보서 1장 14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성경 말씀도 영적으로도 욕심에 이끌릴 수 있어요. 나 이런 말씀 받고 싶어요. 그러면 그런 말씀밖에 안 보여. 욕심에 미혹돼서는 안 돼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그런 확신이 드는지 욕심에 이끌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런 확신이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잖아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신이 있다면 세 번째로는 우리의 입으로 시인할 때 능력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의 입으로 시인을 해야 돼요. 우리의 입으로 시인해야 돼요. 사도 바울이 한 게 바로 그거예요. 사도 바울이 한 게 이제 다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거기 일어나서 “안심하라.”라고 얘기하죠. 이거요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에요. 상황은 다 죽게 됐어요. 상황은 다 죽게 된 거예요. 그런데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일어나서 담대하게 얘기해요. “나의 하나님이 안심하라고 얘기했고, 아무도 안 죽어. 나 하나님을 믿어.”라고 선포했을 때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보여지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에 의해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도적으로 주신 그 말씀인 거에 대한 확신이 검증된다면 말씀을 주셨다면 선포하는 거예요. 바로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광 받으시게 되어진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들, 제가 풍랑 속에서 얘기를 하지만 세 번째 포인트는 얘기하고 싶어요. 그래도 풍랑에 안 빠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아요. 사도 바울의 말을 처음부터 들었으면 풍랑에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을 텐데 우리 인생에 있어서 풍랑에 빠지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이 풍랑에 안 빠져도 되는데도 스스로가 풍랑에 들어가는 경우는 언제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첫째로 그건 뭐냐면 내 자신의 실력을 믿을 때 그런 일이 발생해요. 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사도 바울이 “금세 겨울 오니까 안 된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의 말을 반대한 사람이 누구냐면 27장 10절에 보니까 “말하되 여러분들아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11절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왜요? 배를 모는 사람은 그들이기 때문에. 배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실력 있는 사람, 그들이기 때문에. 선장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믿은 거예요. 그 사람들의 실력을 믿은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믿는 사람들도 그래요. 내 경험, 나의 실력, 내 생각, 내 상식. 그것을 최우선으로 여기잖아요? 그때 우리는 여지없이 풍랑을 만나게 돼요.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만 의지하길 원하거든요. 그래서 잠언 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세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내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렇기 때문에 나를 믿지 마세요. 내 실력을 믿지 마세요.

두 번째는 다수결만을 쫓아가지 마세요. 다수결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배에 탔던 다수는 뭘 원하는 줄 아세요? 12절에 보니까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함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그런데 배에 탄 다수는 그 도시가 불편하다고 느낀 거예요. 그래서 베니수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니스가 저기예요. 얼마나 그 도시는 재밌겠어요? 환락의 도시예요. 맛집도 많고, 좋은 호텔도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있는 이 미항은 민박밖에 안 돼요. 먹을 식당도 없고, 환락가도 없고, 재미있는 술집도 없고, 맛집도 없어요. 그러니 배에 탄 나머지 사람들이 베니수에 가자고 선택한 거예요.

세상은 자기 이익을 위해, 자기의 기쁨을 위해, 자기의 쾌락을 위해 손을 들어요. 투표를 해요. 그런데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옳다고 해서 쫓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풍랑을 만날 수밖에 없겠죠. 다수가 손을 든다고 쫓아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말씀이 주시는 대로 쫓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순풍만이 최선의 길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떠났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가을은 짧습니다. 그런데 가을 끝부분에 배를 타니까 순풍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13절에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를 했다는 겁니다. 의기양양했죠. “사도 바울, 너 틀렸어. 내가 맞았어.” 그런데 믿는 사람이 그때 흔들릴 수 있어요. “하나님,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게 순풍이 웬 말입니까? 저 사람들이 잘났다고 하는데 저는 할 말이 없도록 왜 하나님 만드십니까?”

그런데 그때 좌절하지도, 속단하지도,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면 돼요. 기다리며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붙들고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풍랑에 같이 동참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세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겁니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이 흔들려서 뒤로 백아웃(back out)하지 말라는 거예요. 믿음을 가지고 그 자리를 지키라는 겁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인 거죠. 세상이 잘났다고, “내 말이 옳았다고 봐, 순풍이잖아.” 하는데, 그게 오래가지 못해요. 그에 휩쓸리지 마세요.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폭풍에도 휩싸이지 않을 수 있게 돼요.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아까 주신 말씀처럼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말씀을 제대로 쫓아갈 때, 풍랑 속에서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어요. 그것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27장 20절을 보면, 그들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여러 날 동안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니 구원의 여망마저 없더라.” 우리가 아까 읽은 구절이에요. 이게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었어요. “아, 죽었구나.” 구원의 여망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사도 바울 혼자 산 게 아니에요. 그 인생의 폭풍 속에서 믿음의 사람이 제대로 서므로 말미암아, 말씀 가운데 서므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도 구원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폭풍 속에 있으세요. 다 선기 바래요. 하나님 음성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기 원해요. 그래서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소망의 빛을 볼 수 있게 하는 그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되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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