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23장 11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23장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23장에는 드디어 사도 바울이 사내들인 공회 앞에 서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내들인 공회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모인 국회의사당 같은 곳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지난주에도 봤듯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유대인들과 정말 잘 지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풀기 위해 결례를 행할 때 자신의 돈을 들여 다른 사람이 결례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도행전 21장 29절을 보면,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합니다. 드로비모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결례를 행했다고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들어 모여 사도 바울을 잡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예루살렘에서 내쫓습니다.

그 상황을 보고 있던 천부장이 그를 영내로 데려가서 신문을 하려고 합니다. 보통은 물어보고 채찍질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흥분한 것을 보고는 바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여 채찍질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죽줄로 매어지자, 바울은 곁에 있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않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이 장면은 좀 의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통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빨리 밝히지 않는데, 이때는 바로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참 힘들고 지쳐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며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2절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합니다. 보통 사도 바울은 입을 맞고도 계속 설교할 사람이었지만, 이때는 다릅니다. 그는 욱해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화를 냅니다. 이 장면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힘들고 지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욕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대제사장을 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공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며 사과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연약한 모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았고, 그래서 꾀를 냅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을 일으켜 그 틈을 타 살아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의 아들이다. 나는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로 말미암아 신문을 받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국회의사당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자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찾아오십니다. 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찾아오셔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너는 로마까지 갈 것이다”라고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어둠 속에 있습니까? 혹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 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그의 힘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삐지시기도 하십니다. 예레미야서 7장 13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화가 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17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마라. 내 말을 듣지 않는 이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말고,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도 마라. 네가 기도해도 내가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말씀을 듣는 사람임을 아시기 때문에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서 주께서 그날 밤에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우리 하나님은 큰 소리로 “바울아, 바울아” 하시며 대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셨지만, 그 후로는 주로 우리의 곁에서 속삭이듯이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일대일의 깊은 대화를 나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도 시편 16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교훈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에 나를 교훈하신다.” 하나님은 밤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을 옆에 모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주신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성령님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단어의 뜻은 ‘옆에서 돕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모할 때 우리의 귀가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특히, 11절에 보면 “그날 밤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 우리의 귀가 열리길 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도 새로운 약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의사가 항암제를 권유했을 때 두 가지 선택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또 다른 항암제를 시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을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신약을 선택했습니다. 신약은 동물 실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저는 14번째 실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직 증명된 것은 없지만, 저는 치료 쪽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세 번의 투약을 받고 MRI를 찍었습니다. 결과는 암이 18% 자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계속 투약을 받자고 했습니다. 저는 오케이 했고, 네 번째 투약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날 생명의 삶을 읽으며, 하나님께 치유 쪽을 선택했는데 18%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말씀 앞에 나갔습니다. 그날 생명의 말씀은 열왕기하 4장 38절이었습니다. 생도들이 배가 고파 산에 가서 나무를 캐다가 죽을 만들었는데, 그 죽에 독이 있어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가루를 가져와서 독을 제거했습니다. 저는 항암제를 투여받을 때 내 몸에 독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을 제거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다음 날 말씀은 나아만이 문둥병을 치유받는 장면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씻어 문둥병을 고쳤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며 저도 치료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답변은 아닐지 모르지만, 저는 이 말씀들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너무 힘든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아,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위로를 주시는 분입니다.

저는 1983년도에 미국에 왔습니다. 삼형제와 어머니, 그리고 저는 주머니에 전 재산 200달러를 가지고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뉴욕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필라델피아까지 가야 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아는 분이 우리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해서 볼티모어로 갔습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연초가 되면 “올해는 어려움이 끝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주님을 바라보는 찬양을 좋아하셨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40명이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로마로 호위해 주셨습니다.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 등 470명이 바울을 호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어둠 속에 있는 인생을 바라보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여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곁에서 말씀을 주시는 것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향해 담대히 걸어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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