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교정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9장 4절과 5절입니다.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땅에 엎드려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아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구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예요. 그런데 왜 이 구절을 제가 좋아하느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잘 들으시면 이 절에서 제가 왜 좋아하는지 알게 될 텐데요. 그러려면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의 뜻을 우리가 좀 이해해야 돼요. 그래서 설교 제목이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입니다. 말씀의 뜻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면서 그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첫째로 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 앞에서 사울이 깨어졌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변화된 사울을 우리가 보게 되죠. 그런데 보통 사람이 변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사람은 변질되기 쉬워요. 안 좋은 쪽으로 가기는 쉽지만 좋은 쪽으로 변화되는 것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성 때문이죠. 인간의 죄성 때문인데, 예전에 역사를 우리가 배우면 그런 적도 있어요. 사람이 무식해서 악해지는 거다라고 해서 어떻게든지 사람을 계몽하고 가르치면 세상은 천국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주장하던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결과는 어때요? 더 악한 인간을 만들죠.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배운 게 없어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에 갔어요. 감옥에서 그를 교화시킨다고 해서 공부를 시키고 졸업까지 했어요. 그리고 그가 이제 감옥에서 나왔는데 또 감옥에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 사람의 죄목이 바뀌죠. 처음에는 좀도둑이었는데 이제는 공문서 위조,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이 배우면 죄도 커져요. 죄 짓는 수도 커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만큼 사람은 변화하기 힘들어요.
특히 사람은 어느 쪽으로 변화되기 쉬운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 좀 이해가 쉬운데요. 어떤 어머니가 아들과 딸이 있는 미국으로 방문을 합니다. 딸은 LA에 있었어요. 그래서 먼저 LA에 있는 딸 집에 방문했어요.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리고는 자고 아침 일찍 엄마가 일어났는데 너무 놀랄 일을 보게 된 거예요. 딸은 아직도 자고 있는데 사위는 일찍 일어나서 혼자 아침 식사를 해 먹고 샌드위치를 도시락으로 싸서 출근을 하는 거예요. 그 사위를 보니까 너무 예쁜 거예요. 자기 딸을 아껴주는 그 사위가 너무 대견스럽고 이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갔어요. 역시 아들과 며느리가 반겨주고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어머니가 또 놀란 거예요. 왜냐하면 아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기 아침밥을 해 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서 나가는 거예요. 며느리는 자고 있는데 그걸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정말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미국 유학까지 시켰는데 궁상맞게 자기 손으로 아침을 지어 먹고 나가는 그 아들이 한없이 측은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며느리가 너무 괘씸하게 보인 거죠.
똑같은 남자의 행동을 보면서 왜 이 엄마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유는 바로 자기 중심적인 생각 때문이에요. 이런 것이 인간이 되게 변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차에 타고 있고 어떤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천천히 걷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욕해요.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횡단보도를 걷는데 누가 빵빵거리면 운전사를 욕하죠. 이런 얘기가 있잖아요. 남이 천천히 운전하면 소심 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운전하면 안전 운전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죠. 똑같은 상황인데 두 가지 잣대가 다른 거예요.
남의 자식이 어른들에게 대드는 걸 보면 버릇없는 거고 내 자식이 어른들에게 대드는 걸 보면 자기 주장이 뚜렷한 것이라고 얘기하죠. 남이 민소매를 입으면 “그래 벗고 다녀라”라고 욕하지만 내가 민소매를 입으면 참 시원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해요. 남이 술자리에 자주 가면 인생을 낭비하는 거라고 하지만 내가 술자리 가면 인생을 즐기는 거라고 얘기하죠. 이런 얘기 있잖아요.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요.
똑같은 일을 다른 잣대로 보는 이유는 항상 내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전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변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상처 주면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믿는 크리스천들도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옆에서 보면 추하게 보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들이 보면 그건 추한 거예요.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이중잣대를 갖고 있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뭐냐면, 그 엄마 스스로도 그래요. 엄마 스스로 그 사위를 그렇게 판단함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화가 나는 거잖아요. 본인에게 상처가 되는 거예요. 아들이죠, 사위가 아니라. 제가 자꾸 헷갈렸네요. 그러면서 그 며느리와의 관계도 나빠지는 거예요. 그런 생각 속에서 관계가 나빠지면서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요. 그렇게 변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오늘 말씀이 답입니다. 사도행전 9장 4절을 다시 보면, “땅에 엎드러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답이 있을까요?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보려면 우리가 사울의 모습을 앞부분부터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이, 여러분 아시죠?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옛날 이름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스데반을 죽인 후에도 아직 바울은 사람들을 죽이러 다니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러 다니고 있고, 이제는 대제사장의 권력을 등에 업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잡으러 다니기를 시작합니다. 굉장히 열심히 해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사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럴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싸울 때, 그 싸움에서 보면 서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하면서 절대로 화해도 안 하고 용서도 안 하고 하나가 되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만 옳다고 이야기하며 사는 그 모습이 사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없었을까요? 내가 하는 일이 틀린 거 아닐까? 아닙니다. 있었어요. 사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요.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사울이 예수님에게 들은 말씀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이 처음 담에 가는 길에 부르심을 받은 짧은 스토리지만, 그것을 좀 더 길게 풀어준 이야기가 사도행전 26장에 나옵니다. 26장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좀 더 길게 나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졌을 때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여기까지 들었어요. 그런데 이 말만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울에게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얘기냐면, 소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소의 채찍은 앞으로만 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뒷발질을 하면 주인이 채찍으로 치면서 앞으로 가라고 하겠죠. 몇 번 맞으면 소도 뒷발질하면 자기가 맞을 줄 알아요. 그러면서도 뒷발질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생을 자초하는 거죠. 사울은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는 일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어요. 이거 뭔가 잘못됐는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언제부터였을까요?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얼굴에 광채가 날 수 있을까? 저렇게 죽으면서도 어떻게 사람들을 향해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죽으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나라로 가는 자의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서, ‘내가 잘못된 거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울이 그런 생각이 들어올수록 자기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여 더 많은 크리스천들을 잡으러 다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담으로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그 상태에서 예수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정말 은혜죠.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는 사울을 예수님이 강권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 4절입니다. “땅에 엎드러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왜냐하면, 내가 박해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 예수님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울에게 “나를 박해하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처음엔 억울했을 거예요. “이게 무슨 얘기지? 나는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지?” 그래서 사울이 5절에 다시 묻습니다. “누구십니까?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랬을 때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여러분, 왜 사울은 이 말씀 앞에 깨질 수밖에 없었을까요? 예수님이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은 무슨 뜻이냐면,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가 다 예수라는 얘기입니다.
네가 죽인 사람도, 네가 잡은 사람도, 네가 지금 잡으려고 하는 사람도, 네가 그렇게 미워하는 그 사람도 다 예수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사울에게 있어서는 이건 엄청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사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울에게 있어서는 유대교는 유일신을 믿죠. 우리도 유일신을 믿어요. 유일신은 한 분이시라는 거예요.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거예요. 예수님도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빛으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까지는 인정이 될지 모르는데, 이제는 내가 만나는 그 사람들도 예수라고 불렀을 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건 너무나도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사울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라는 얘기입니다.
제가 설교 때도 이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설교하는 저조차도 이렇게 얘기하면 좀 이상해요. “내가 예수입니다” 듣는 여러분도 좀 이상하죠? 그렇지 않나요? 이걸 자주 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저 인간 이제 드디어 이단에 빠지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굉장히 어색한 말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게 그거예요. “네가 핍박하는 사람이 예수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예수라는 얘기예요. 네 옆에 있는 사람이 예수고, 그 사람이 예수라는 얘기입니다. 이 말씀을 한 번 딱 들었다고 해서 바로 깨달을 수 없는 사상이나 생각이 깨질 수 없는 그 말씀을 들은 겁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음성이라 괴로워하고 묵상하겠죠.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그래서 제대로 묵상하도록 상황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어떻게 해요? 눈을 멀게 하세요.
8절에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이게 그에게는 정말 중요한 훈련의 시간이었어요. 왜냐하면, 6절을 보면,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내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이제 말씀을 주세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주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시내로 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는 혼자서 순종을 못 해요. 왜요? 안 보이니까. 안 보이니까 자기 스스로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어요. 안 보이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누가 필요하냐? 8절에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중요한 단어가 이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손에 끌려 담으로 갔어요. 사람의 손, 그 손이 없으면 내가 진리의 길을 걸어가지 못해요.
예전에는 사울은 자기 스스로가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내 스스로가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더더욱 말씀을 받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유일하게 그 능력을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누구였어요? 다른 사람의 손이었던 거예요.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가니까 담으로 가게 된 거예요. 사울은 그때 느꼈을 거예요. 이 사람의 손이 바로 예수의 손이라고. 왜냐하면, 이 사람이 예수라고 했으니까. 내가 지금 예수의 손을 붙잡고 가고 있구나.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예수의 손을 붙잡고 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방법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10절에 보면, 그때 담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어요.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까, (길어서 제가 다 써 놓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아나니아에게 그래요. “야, 사울이라는 사람이 너한테 올 텐데, 사울이라는 사람이 유다의 집에 있는데 가서 네가 안수해, 눈을 좀 떠 줘.” 아나니아가 처음엔 그래요. “주님,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죽이는 사람 아니에요?” “야, 내가 그를 이방을 위해서 택했으니까 내가 가서 안수해 줘.”
그래서 10절에 드디어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손으로 그에게 갖다 댄 거죠. “형제 사울아, 주님이 너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 이게 뭐예요? 또 사람의 손을 이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던 눈이 띄어진 거예요. 이게 아나니아의 손이지만, 사울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손인 거예요. 예수의 손인 거야. “아, 내가 또 예수를 만났구나. 아나니아를 통해서 예수를 만나는구나.” 또 다른 예수를 만나는 거예요. 아까는 그 손길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으면서 내가 예수의 손을 만났는데, 아나니아의 손을 통해 예수를 만나는구나. 이 경험을 통해서 사울은 깨지는 겁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바로 예수구나.” 그래서 선교 열심히 했을까요?
그 이유가 뭐냐면, 이 사람은 아직 예수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 사람을 예수 믿게 하면, 나는 또 다른 예수를 만드는 거잖아요. 이처럼 귀한 사역이 어디 있어요. 이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열정을 거기다 쏟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자기 스스로 이 모든 상황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이렇게 표현해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 표현해요. 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예요.
여러분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만 생각해요.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느끼는 그 은혜는 더 커요. 그 뭐냐면, 사람을 통해서 은혜받는 것도 은혜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자기가 스데반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은혜고, 자기가 눈 멀었을 때 누가 내 손을 잡아서 담으로 주의 뜻을 이루도록 한 것도 은혜고, 그렇죠. 내가 눈이 멀었을 때 내 눈을 안수 받게 한 것도 은혜고, 안수 받아서 눈이 뜨인 것도 은혜. 사도 바울에게서 만나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인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를 만난 거기 때문에.
저는 아프면서 그런 생각 참 많이 해요. 그건 뭐냐면, 내가 여러분들을 만난 것이 은혜다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해요. 다른 곳에 가서 내가 우리 교인들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예,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정말 우리가 은혜예요. 이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분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예수님을 경험하기 때문에,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로 본다면 귀할 수밖에 없어요. 귀할 수밖에 없어요.
그 어머니처럼 이중잣대를 가질 수가 없어요. 자고 있는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미워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며느리도 예수님이기만 하면, 우리 성도들이 그 시선을 가지기를 원해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서, “예수구나, 예수.”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도 그 생각을 하셨다고 우리에게 얘기를 해요. 예수님에 대해서 빌립보서를 쓰면서, 빌립보서 2장 3절에 무슨 얘기를 하냐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 이게 중요한 거예요. 남을 낮게 여기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예수님도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셨다고요? 예수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셨어요.
이게 말이 돼요? 예수님은 완벽하신 분이에요. 예, 완벽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에는 항상 우리를 바라보면서 “얘가 나보다 나아.” 그래도 얘가 나보다 나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갖고 계셨어요. 그리고 그 생각대로 사셨다 얘기예요. 나보다 낫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는 얘기를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거예요. 그 생각으로 여러분, 우리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세요? 우리 아이를 바라보면서,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을 예수로 바라보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야. 나보다 나은 사람이야.”라고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우리의 관계는 똑같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관계는 똑같을 수가 없어요.
저는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나를 왜 박해하느냐”라는 말씀이, 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깨닫기를 원해요. 그래서 내 옆에 있는 한 분 한 분이 예수님을 보여주고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두 번째는 이 말씀대로 이미 사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면 바나바라는 사람이에요. 바나바라는 사람 보세요. 20절에 보니까, 사울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해요. 눈 뜨자마자 바로 회당 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전하니까, 그 안에 있던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게 못 믿어요.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해요.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죽이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죠. 예수 믿는 척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교회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잡아가려고 이 사람이 쇼하는 거라고 다 의심해요. 아무도 안 믿어요.
26절에 보니까 예루살렘까지 가서 제자들을 사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 두려워서 그 제자들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아무도 안 믿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근데 문제는 이쪽만 안 믿은 게 아니에요. 반대쪽, 옛날에 자기 편이었던 사람들. 22절에 보니까, 사울이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니,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혹하게 하니라.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면 유대인들이 “진짜 예수 믿었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합니다. 얼마나 죽이려고 하냐면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 앞에 지키는 거예요. 이제 사울은 나타나면 죽었어요. 그러니까 사울은 예수를 만나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의지할 데가 없는 거예요.
그때 그를 믿어준 사람이 있어요. 그게 바나바예요. 여러분들, 말씀대로 이미 사는 사람은 첫째, 믿어주는 사람이에요. 믿어주는 사람. 여러분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불신의 시대라고 얘기해요. 오히려 우리는 뭐라고 하냐면, “사람 믿으면 큰일 난다”고 얘기해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어요. 예, 그런 시대. 우리가 사람을 믿어 주잖아요? 그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거예요. 우리가 사람을 믿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왜냐면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예수잖아요. 안 믿으면 큰일 나잖아요. 예, 바나바는 이미 그걸 하고 있었어요. 믿어주는 거. 믿어주는 거.
예, 믿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뭐 하냐면, 두 번째로 세워주는 사람이었어요. 세워주는 사람. 27절에 보니까,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에 대하여,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말하면 안 들으니까, 바나바가 사울을 옆에 데리고 가서 대신 간증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이렇게 만났어요. 이 사람이 이런 말을 전하고 다녀요.” 대신 간증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을 지금 세워주는 거예요. 세워주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세워주냐면, 사울을 1인자로 세우고 자기는 2인자로 물러날 정도로 세워주는 거예요. 그 정도로 세워준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성경을 보면, 예를 들어서 13장 보면 이름의 순서가 이렇게 돼요. 7절에는 처음 시작할 때는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이 지혜 있는 사람이라”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름 순서가 뭐냐면 바나바와 바울이 있어요. 바나바와 사울이 있어요. 바나바와 사울. 그런데 이 순서가 그다음부터 바뀌어요. 그래서 43절을 보면, 회당의 모임이 끝나는데 유대인과 유대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죠. 순서가 이제 누가 1인자가 된 거예요? 바울이 1인자가 된 거예요. 예, 그래서 계속돼요. 그다음에 46절에 가니까 또 뭐예요? 여기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50절을 보니까 바울과 바나바를. 예, 제가 바나바였으면 성경 쓰는 사람도 정말 야박하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꿔버리나요. 이런 걸 가지고 사람을 차별 하나 할 정도로 완전히 바뀌어요. 이렇게 되게 누가 만든 거예요? 바나바가 한 거예요. 바나바가 한 거예요.
여러분도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유튜브가 없어요. 전화도 없어요. 소문에 의해서 살아요, 소문에 의해서. 근데 처음에 사울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퍼졌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 잡아죽인대. 사울 조심해, 사울 조심해, 사울 조심해, 사울 조심해. 그게 세계로 쫙 퍼져 있었어요. 유대인들을 통해서.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예수를 믿었다. 근데 이제 소문이 퍼질 거 아니에요. “야, 사울 예수 믿었다. 예수 믿었다.” 문제는 뭐냐면요, 죽인다는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그러면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무도 안 믿어요. 그런데 거기를 다 다니면서 대신 간증해 준 사람이 누구예요? 바나바. 바나바가 데리고 다니면서 대신 간증해 줘요. 이거요, 능력 없는 사람이면 이게 가능하지 않아요. 바나바가 교회에 엄청난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왜요? 그 사람 말이면 맞아. 하는 거예요. 어느 지역에 가든지 바나바가, “이 사람이 진짜예요.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고요, 예수님 진짜 만난 사람이에요.” 그 말을 믿게 만드는 것은요, 바나바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바나바는 언제든지 1인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기 스스로가 2인자가 되기를 선택한 거. 왜요? 이 사람이 예수기도 더 높아져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나바는 그런 행동을 한 거예요. 그 행동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합니까?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여기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죠. 여러분들 아세요? 제가 어릴 때 늘 들으면서 뭔 소리 들으면 살았다고요? “착하다” 얘기 들으면 살았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님이 늘 저한테 그러셨어요. “지와 누가 옆에서 착하다 그러면 너 바보란 얘기야. 좋아하지 마. 좋아하지 마.” 우리 어머니 제일 듣기 싫었던 소리가 그거였어요. 왜냐면 제가 어릴 때 뭐 이렇게 장난감이나 이런 게 많아서요. 저희 집이 잘 살아서. 근데 누가 조금만 이렇게 갖고 싶으면 전 다 나눠줬어요. 다 나눠줬어요. 뭐 무소유 소유자이기 때문에 아니라 싸우는 게 싫었어요. “그거 네 거야, 내 거야” 막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게 너무너무 싫었어요. 그러니까, “어, 그래, 너 가져.” 가져. 가져. 우리 어머님이 속이 불타. 너무 화딱지가 나는 거예요. 뭐 사주면 늘 남의 손에 다 갖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볼 때는 제가 어떻게 보여요? 착한 일로 보이는 거예요. 근데 저는 어릴 때부터 다 속셈이 있었거든요. 그 속셈이 뭐냐면, 이런 것 가지고 싸우면 내가 피곤해. 제가 피곤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거 가지고 싸우고 있어. 예, 그 신경 쓰고 싸우면 관계 개선하고 막 이래야 되잖아요. 그런 게 피곤했던 거예요. 예, 근데 그걸 착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근데 지금도 많은 분들이 그래요. 세상 사람들은 착하면 더 등쳐 먹으니까, 착하면 안 돼라고 생각들을 많이 해요. 근데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러세요. “너 착한 사람이 돼야 돼.” 여기서 착한 사람이라는 건 뭐냐면, 내가 1인자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거예요. 왜냐면 이 사람이 예수기로 더 잘돼야 돼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바나바의 모습. 이 바나바 때문에, 바나바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세 번째는 이런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되느냐. 31절에 그래요. 온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어떻게 해요? 평안하게 됐어요. 교회가 싸우지 않았어요. 교회 바깥에는 박해가 있었지만 교회 안에는 없었어요. 교인들끼리 싸우는 일이 없어요. 서로 세워줘요. 예, 서로 세워줘요. 서로 존귀하다고 그래요. 서로 나보다 낫다고 얘기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해요?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어요.
이 세 번째 포인트는 어떤 면에서 결론의 부분이에요. 결론의 부분이에요. 그 뭐냐면, 여러분들,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 옆 사람을 보면서 예수로 보세요. 예수를 보이기 원해요. 예, 내가 누구를 힘들게 하면 내가 예수님을 힘들게 한 거 맞아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얘기하세요. “너 나 지금 아프게 하고 있어. 네가 나를 박해하고 있는 거야. 나를 욕되게 하고 있는 거고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야.” 왜냐면 저 사람이 나야. 저 사람이 나야. 그걸 우리가 깨닫기 원해요.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보면서 모든 사람을 예수로 보며,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해요. 내가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기를 원해요. 내가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길 원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기 원해요. 그래서 믿어주고 바나바처럼 세워줌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러한 우리들의 변화된 모습 때문에, 깨어진 모습 때문에 교회가 평안하고 날마다 든든히 세워져 가는 그러한 우리 모두가 되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