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창세기 4장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을 말씀은 창세기 4장 1절입니다. 모두 큰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등남하였다 하니라.” 아멘.
우리가 계속해서 창세기를 보고 있는데, 창세기에는 처음 있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읽은 1절에서도 그런 처음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가 처음으로 자녀를 낳고, 첫 가정을 이루는 모습이죠. 그런데 창세기 4장에는 또 하나의 처음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죄’라는 단어입니다.
4장 7절을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서 ‘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가정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정에 죄가 등장하고, 이 죄로 인해 가정에 상처가 생깁니다.
이 첫 가정에 상처가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첫 예배 때문입니다. 아벨이 첫 제사를 드렸고, 가인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잘못된 예배를 드림으로써, 결국 첫 가정에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가정에 상처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함께 이 문제를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상처 속에 있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도 상처가 있지 않나요? 그 상처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가정에 상처가 생긴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누구의 잘못일까요? 분명 가인의 잘못입니다. 아벨의 잘못은 없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이에 끼어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인의 입장이었다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다 이해가 되었을까요? 왜 내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참 많습니다. 똑같이 공부를 해도, 한 사람은 성적이 잘 나오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을 때가 있죠. 이것이 꼭 노력의 차이만은 아니고, 아이큐나 재능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보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나님, 왜 이러시는 걸까요?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을 때, 하나님께 불평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4장 6절에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분노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든 안 받으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그 뜻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그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일들 앞에서 불평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 민족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뉘리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 말씀은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에서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을 따르지 않기로 결단하다 보니 가정에 상처가 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고 억울하더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바를 따르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설교는 저를 향한 설교이기도 합니다. ‘왜 제가 아파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결정을 인정하고 따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로마서 9장 20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하나는 귀한 그릇을, 하나는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컴플레인할 수 없어요. 왜 누구는 금그릇이고, 나는 질그릇인가요? 왜 누구는 다섯 달란트를 받고, 나는 한 달란트를 받았나요?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심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제가 이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가인이 그랬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이렇게 말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왜 제 제사를 받지 않으셨어요? 무엇이 문제인가요? 제가 고치겠습니다.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랬다면 창세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럴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7장 27절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자녀를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얼마나 화가 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옳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의 말씀을 맞다고 인정하며 은혜를 간청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들으시고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과거에는 장자가 큰 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이삭을 택하셨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아들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도 큰아들이 아니라 요셉을 택하셨고, 영적으로는 넷째 아들 유다를 택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 없이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셔서, 사랑하셔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나의 부족함에도 나를 사용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저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나온 말씀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 저는 제 삶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할 때, 가정과 공동체가 상처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시기하는 마음이 가정에 상처를 줍니다. 저는 설교 중에 종종 시간을 확인합니다. 아까 1부 예배 때는 설교를 조금 줄였더니 9분이 줄었더라고요. 이제 천천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시기하는 마음입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가인은 화가 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벨에게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죄를 다스려라!” 하지만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다스리지 못하는 죄 중 하나가 바로 시기심입니다. 시기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아주 무섭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굉장히 이상하게 작동합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생각했냐면, “이 사람만 없으면 내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을 텐데.”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죠? 아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건 아벨과는 상관없는,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은 희한하게도 “너 때문에!”라고 탓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렸습니다.
시기심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시기심은 정상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시기심은 자기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주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시기심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더욱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형제자매 사이에서 시기심이 자주 발생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은근히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어렸을 때는 누나가 동생을 꼬집기도 하고, 커서는 서로 비교하고 경쟁합니다. 자녀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서로 비교하며 시기와 질투를 키웁니다. 그런 시기와 질투가 결국 가정에 상처를 주고 부모에게 아픔을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의 시기심 때문에 얼마나 아팠을까요?
이 시기심은 우리의 DNA 속에 있습니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첫 자녀였던 가인에게 시기심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시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기심은 제어하기 어려운 시험 중 하나입니다. 어떤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사탄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유혹을 했습니다. 여자를 보내고, 물질로 유혹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으로도 시험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에게 한 마디를 던졌을 때, 수도사는 그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뭐라고 말했냐면, “너의 친구 아무개가 어제 수도원장이 됐대.” 이 한 마디에 그 수도사는 바로 무너졌습니다. 그만큼 시기심은 무섭습니다.
그렇다면, 시기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첫째로, 그 사람의 전체를 바라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한 가지 잘하는 것만 보고 시기심을 느끼는데, 그 사람의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잘하는 부분이 있으면 못하는 부분도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면, 그 사람은 친구가 별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공부에 시간을 많이 쏟다 보니 운동을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 전체를 바라보세요. 다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내가 없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형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었는데도 그걸 보지 못하고 동생에게 송아지를 잡아준 것만 보고 시기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셨음을 깨달아야 시기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로, 시기심이 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시기하고 질투하지”라며 쉽게 넘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기심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돌이켜 시기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외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참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 ‘배 아픈 것’이 바로 시기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시기심을 죄로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기심 때문에 미워하게 되고, 경쟁하게 되고, 가정에 상처를 줄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가정에 상처를 주는 큰 요소 중 하나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분노와 화를 구분합니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고, 통제되지 않는 분노가 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노는 낼 수 있지만, 그것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되어, 가정과 공동체가 상처받고 파괴될 것입니다.
가인은 왜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을까요?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가인 신드롬’이라고 부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를 품게 되었고, 결국 아벨을 죽이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을까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와가 여자인데, 하와의 후손 첫째 아들에 대해 하와는 어떤 기대를 했을까요? ‘얘구나, 얘가 메시아구나. 얘가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우리가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을 때 그 기대가 아주 컸을 겁니다. 그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그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실망도 그만큼 컸을 겁니다.
그 실망을 가장 크게 느낀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은 큰 기대 속에서 자라났고, 그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큰 실망을 안겨드리는 것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가인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부모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인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참 안타까운 점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물어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아이가 메시아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야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한 자녀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었고, 그로 인해 큰 실망을 느끼고 그것을 모두 가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가인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인에게 그만큼 기대를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가인의 이름의 뜻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의 이름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자의 후손을 주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낳으면서 그의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왜 부모가 둘째 아들의 이름을 ‘허무함’이라는 뜻으로 지었을까요? 첫째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둘째에게는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첫째를 보면서 둘째 아들에게 기대하지 않았고, 결국 그 허무함이 이름에 담겼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상처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아벨입니다. 아벨은 평생 인정받지 못하고 자랐고, 부모의 기대가 자신의 형에게만 향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가인은 그 상처로 인해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은 분노할까요? 왜 그렇게 쉽게 화를 낼까요? 그 이유는 분노의 원인을 항상 남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화낼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남을 탓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화가 날 때는 남을 탓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제가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저에 대해 우리 가족들이 항상 크리스마스 카드나 생일 카드에 적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화를 잘 내지 않을까요? 습관적으로 누군가가 저를 화나게 하려고 할 때, 저는 먼저 ‘내가 화낼 만한 일을 했나?’ 하고 생각합니다. 즉, 나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 저 사람은 화낼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화가 나지 않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화를 조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 상대방이 옳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니 괜히 화내고 나서 웃긴 상황이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중요한 사명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 둘째는 봉사, 셋째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사랑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많은 한국 성도들이 예배와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코이노니아를 소홀히 합니다. 교제는 매우 중요한데,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미움과 시기, 화가 생기고, 그 상태로 예배를 드리면 예배도 봉사도 빵점짜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제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답했습니다. 형이 동생을 지켜야 하는데, 가인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제를 이뤄야 가정이 상처받지 않고, 공동체가 상처받지 않습니다.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우리의 예배가 완성되고, 봉사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왠지 불만족스럽거나 불평이 있으십니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순종하며 나아가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책임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예배자와 봉사자로, 가정과 공동체의 치유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