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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24장 5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오늘은 우리가 사도행전 24장을 보게 되는데, 24장을 보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자 사도 바울에 대한 평가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 앞에서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모습을 또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두 가지 포인트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설교 제목은 ‘전하는 자와 기회를 놓친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로, 제대로 전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사도 바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바로 우리가 읽은 5절의 말씀입니다. 5절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사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보니”라고 시작을 하죠. 우리가 저 사람을 보니까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은 전염병 같은 자라고 평가를 내립니다. 그리고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이다, 이렇게 그를 평가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여기 나온 대로 ‘전염병 같은 자’에 대해서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이 영향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사도 바울은 사도의 원수들이 보기에도 전염병 같은 사람이었어요. 복음이 병처럼 막 퍼져가는,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게 된 거죠.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얘기했냐면, 사도 바울을 가만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 사람을 가만 내버려 두면 이 로마 사회 전체에 전염병처럼 퍼져서 우리 로마가 망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나쁘게 얘기하려고 이렇게 표현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이 한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 복음을 천국은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천국은 누룩과 같다라고 얘기하거든요. 들어가면 막 커지게 하고 퍼지게 하고 그렇죠. 겨자씨 같다, 땅에 심기면 막 자라고 전염병처럼 퍼지는 그런 복음의 생명력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바로 사도 바울이 그런 일을 제대로 한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의 키가 우리로 하면 4피트 6인치 정도 돼요. 키가 작은 사람이에요. 남자 치고는 굉장히 작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사람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이다, 저 사람 가면 다 퍼진다, 얼마나 크게 얘기하는 거예요, 큰 사람으로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사도 바울이 전염병 같은 사람이었다고 그렇게만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소원이 이 말씀 안에 있기를 원해요. 주님, 저도 사도 바울처럼 전염병 같은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제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 이것이 전염병처럼 막 퍼져 나가는 그런 역사를 저로 보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이 여러분 안에 있기를 원하고,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퍼져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복음에는 사랑이라는 바이러스가 있기 때문이에요. 사랑이라는 바이러스가 있기 때문에 퍼져나갈 수밖에 없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렇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서 죽게 하신 그 사랑. 그래서 그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그 사랑이, 사랑이 바이러스 같은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접하는 자는 그 사랑이 하트에 마음에 주입이 되면서 복음이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거죠.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죄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인데, 나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고, 나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그 기가 막힌 사랑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사랑을 깨닫는 바이러스가 들어가면 예수를 믿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바로 우리에게는 그 사랑이라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도 그 사랑을 전하면 퍼질 수밖에 없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염병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는 천하를 소요하게 하는 자라고 5절에서 읽었던 5절에서 그렇게 평가를 내렸죠. 소요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결국에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되면 어떻게 돼요? 삶이 변하기까지 하겠죠. 복음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복음이 들어가면 세상을 흔들어요. 세상을 흔들어요. ‘아,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해요. 어떤 사람에게는 흔들어서 ‘왜 이렇게 내 마음이 아프지? 내 죄 때문인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복음이에요. 그리고 결국에는 그 복음이 제대로 심겨지고 되면 은혜 때문에 그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의 결국에는 은혜로 경험되어 변화에 이르기까지 하는 거예요. 그 삶이 은혜 때문에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라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에요. 젊을 때 청년 사울은, 그 청년 때는 이름이 사울이죠. 은혜 때문에 자기가 이 복음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에 자기를 흔들 말미암아 은혜를 체험하고 바뀌었다고 자기가 스스로 얘기하거든요.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비방자였으며,” 맞죠. 크리스천을 비방하는 사람이었고, 박해하는 사람이었고, 폭행하는 자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었다는 거예요. 나는 믿지 않았는데, 알지도 못했는데 주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표현해요. 14절에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여,” 자기가 변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의 모습을 15절 뒷부분에 보면 이렇게 표현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이런 사람인데 그 은혜 때문에, 은혜 때문에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 내가 소요가 되어서 자기가 변했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소요가 되고 변할 수밖에 없는 은혜가 함께하게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우리가 결단하고 우리의 소원이 되고 기도의 제목이 된다면, 주님, 저도 우리가 만나는 그 사람을 소요하게 하는, 그래서 변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했을 때,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 할 일은 그 소원을 갖는 거예요. 그 소원을 갖는 거예요.
세 번째는 죽은 자의 부활을 외치는 자다, 부활의 신앙을 선포하는 자다. 21절에 보면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신문을 받는다.”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라 무슨 얘기에요? 자기가 신문을 받는 이유는 내가 부활에 대해서 외쳤기 때문이라는 얘기예요.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부활을 전하는 자라는 거예요. 어떤 면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부활을 전한다는 게 제일 힘들어요. 세상 사람들이 제일 믿기 힘든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예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 어떻게? 특히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이 그래도 있어요. 그런데 다른 도시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
는데,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아난다고 누가 믿겠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믿거나 말거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부활을 전하는데, 이게 먹혀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죠. 그런데 먹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면, 사도 바울의 간증 때문이에요. 사도의 간증을 통해서 내가 죄인이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변화된 걸 봐라. 왜냐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나도 내 삶에 부활을 체험하고 부활을 체험했다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부활을 믿게 만드는 삶을 사는 거죠. 여러분, 부활을 전하는 자는 그냥 말로만 전하게 하시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부활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세요. 부활의 능력이 그 사람과 함께함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으로 부활을 믿게 하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될 때 우리에게도 좋은 거예요. 우리에게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이실 거니까. 세상 사람들은 “말도 안 돼,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나가서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저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전하는 사람이야”라고 얘기하면서도 믿게 되어지는 거죠. 전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때 우리 모두가 바로 부활을 외치는 자, 부활의 신앙을 전하는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바로 이런 사도 바울을 바로 앞에 놓고도,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으면서도, 사도 바울을 통해서 부활을 들으면서도 기회를 놓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두 번째 포인트예요. 기회를 놓친 자들.
첫째로, 대표적으로 기회를 놓친 사람이 누구냐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나와요.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여러분들, 대제사장이 누구예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1년에 한 번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가장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자기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사람이 대제사장이에요. 솔직히 저는 이 당시에 대제사장은 무슨 생각으로 지성소 안에 들어갈까라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대제사장 직분도 돈 주고 사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지금 이 사람 같은 경우에는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나아간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다, 참 말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죠. 우리는 대제사장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여러분들 우리도 대제사장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예배로 나오고 있어요. 하나님 존전 앞에 나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혹시 우리는 대제사장처럼 착각하고 있지 않나요? 대제사장은 자기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아요. 자기가 영적으로 대단한 줄 알아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면서, “내가 대제사장이니까 인정해, 나를 존경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어요. 우리 어떠합니까? 우리는 성도고, 목사고, 어떤 직분을 맡은 자, 아니 성도라는 그것 자체도 엄청난 거거든요. 예수님 때문에 성도가 된 우리들인데, 그리고 하나님 임재 앞에 나오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대제사장처럼 그런 척하면서 그런 줄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나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여러분들, 솔직히 예수를 오래 믿었다는 것은 칭찬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예수를 오래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할 수 있어요. 저도 그래요. 제가 목사라서 더 대단해요. 왠 줄 알아요? 저는 할 수 없이 말씀을 봐야 돼요. 싫으나 좋으나 설교해야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은 안 봐도 되잖아요. 그런데 보잖아요. 대단한 거잖아요. 저는 할 수 없어서 하면서도 내가 다른 성도보다 더 낫다고 착각하는 그런 모습들이 이게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모습이에요. 바로 그 모습에, 그런 교만에 빠질 때, 나와 지금도 동행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놓칠 때가 많은 거죠. 주님을 만나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면서 그런 척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회개해야 될 것은 없는지를 생각해 봐야 돼요. 그런 모습은 바로 기회를 놓치는 모습이죠.
두 번째로 기회를 놓친 사람은 변호사 더둘로입니다. 1절에 보면,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이 변호사가 등장을 하죠. 여러분, 보통 변호사는 어떤 죄진 사람을 풀어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도 바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이 사람이 찾아낸 결과가 아까 읽었던 5절입니다. 이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고,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다.” 이만큼 사도 바울을 연구했으면 ‘이 사람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어야 했을 텐데, 복음을 들을 기회도 있었을 텐데, 이 더둘로는 그런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는 은혜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떤 사건이 닥치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것이 없고, 기뻐할 것이 없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뒤에 함께하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이 더둘로처럼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기 원합니다. 감사할 것이 있는지, 기뻐할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지, 바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로 기회를 놓친 사람은 벨릭스와 그의 아내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과거에 사도 바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24절에 보면,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의 아내 유다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들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들었어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들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사도 바울에게 1:1로 들었습니다. 얼마나 큰 기회입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25절에 보면, 바울이 의에 대해서, 절제에 대해서,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 강론하니까 이들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러면서 벨릭스가 말합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두려움까지 느꼈으면서도 왜 그랬을까요? 이런 걸 알려면 벨릭스라는 사람의 배경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벨릭스는 원래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아마 돈을 어떻게든 많이 벌었나 봅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고, 돈이 많아지자 높은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였냐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습니다. 높은 가문과 결혼한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이 사람은 자꾸 높아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자리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해서 유대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높이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잘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에 와서 유대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지위를 유대인에게 보여주고, 자기가 유대인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아내가 유대 여자 드루실라입니다. 이 벨릭스는 명예, 지위, 권력에 집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들어가도 자기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흔들 수 있는 것은 거절했던 것입니다. 두렵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 여자 드루실라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역사책에 따르면 이 여자는 굉장히 예쁘게 생긴 여자였습니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많은 남자를 유혹했던 사람입니다. 15살 때 왕족과 약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약혼한 사람을 차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 남자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결혼을 벨릭스와 한 것입니다. 첫 약혼이 15살 때이고, 첫 결혼이 18살 때입니다. 그녀는 젊음을 이용해 자기 욕정을 채우는 데 다 쓴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문제는 육체의 정욕에 빠져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회개하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미디어와 여러 매체들이 우리의 정욕을 부추기면서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고, 정욕에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들의 삶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 세상의 지위, 세상의 정욕을 사랑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 이들의 문제는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25절에 보면,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라고 합니다. 미루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미루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중에’라고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다 보면 말씀을 읽어야지 하다가도 ‘나중에 읽지 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해야지 하다가도 ‘나중에 하지 뭐’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으면 ‘이거 순종해야 하는데 나중에 하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탄이 쓰는 가장 큰 무기가 미루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루다 보면 결국에는 안 하게 됩니다. 안 하게 되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너무 자주 넘어갑니다. 미루는 것은 신앙의 가장 큰 독입니다. 미루지 마세요. 생각나면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바로 행동으로 옮기세요. 실행하세요. 그래야 기회를 잃지 않고 은혜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부의 문제는 물질에 마음을 뺏긴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거로 더 자주 불러 사도 바울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면 사도 바울이 뇌물이라도 줄 줄 알고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안 줍니다. 왜 돈을 안 줬을까요? 사도 바울은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지역에서 큰 헌금을 걷어다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눈에는 사도 바울이 부자인 줄 착각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잘 모릅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저를 보더니 “너 크게 성공했네. 돈도 많이 벌었겠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돈에 마음을 뺏기다 보니, 물질에 마음을 뺏기다 보니,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부부의 문제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명예, 지위, 권력, 정욕, 돈까지.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은혜가 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소원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소원이 생기길 바랍니다. “주님, 저는 사랑이라는 바이러스를 전파함으로 전염병 같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전하는 복음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역사를 보게 해 주세요. 부활의 주님을 담대하게 전함으로 부활의 주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하심을 세상에 보이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은혜의 잔치에서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예수를 오래 믿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직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된 줄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매일 체험하며 살 수 있는 삶이 되게 해 주세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바라보며,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삶이 되게 해 주세요. 물질이나 세상의 지위나 정욕이나 돈에 내 마음을 뺏기지 않고 복음 앞에서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 속에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