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22장 1절에서 3절까지 말씀입니다. 함께 큰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시작.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아멘.”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를 보면 1996년부터 지금까지 탑 10에 빠진 종류의 책들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책인지 아세요? 시집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시집을 사 보지 않습니다. 시를 읽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죠. 인터넷을 보면서 모든 걸 빨리빨리 보고 지나가는 시대입니다. 인생의 깊이 있는 생각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책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옛날 이야기들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듣고 싶어 하지 않죠. 밥 먹을 때 옛날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잘라 버립니다. 유튜브나 다른 매체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어른들이 태어나서 중년의 삶을 살고 노인의 삶을 사는 그 스토리 안에 진정한 지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가 뭐냐면 성경 자체가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여기서 변명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출생부터 시작해 이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율법에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앙이란 어떤 면에서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떤가를 보려면 그 사람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할 때 나의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3차 전도 여행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요즘 시대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더 명확하고 멋지게 잘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찬송가에 보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This is my story”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스토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고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우리에게도 이런 이야기가 있기를 원합니다”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이야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 이야기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요?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 들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랑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3장 7절에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여러분의 이야기에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모습이 들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빛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언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말씀을 통해, 기도 응답을 통해, 집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죠. 그 감격이 바로 여러분의 스토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들어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이야기를 전할 때 말을 끊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격을 요구합니다. 그 자격을 얻는 방법 중 하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이야기에는 예수님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었는가가 들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바로 그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에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모습이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 변했어”라고 말할 때, 그 말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예를 들어, 아내가 저에게 “당신 변했어”라고 한다면, 이는 좋은 말이 아니에요. 이는 사랑이 변했다는 이야기거든요. 세상 사람들은 ‘변했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세상은 대개 좋게 변하지 않거든요.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나쁘게 변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변했다’는 말에 대해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만은 좋게 변할 수 있어요. 그만큼 세상은 변화에 대해 기대가 없고, 인간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좋게 변한 것을 볼 때 그것은 능력이 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할 자격이 되고, 복음을 전할 능력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예수님 때문에 내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6절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는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비치는 빛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변화되어서 착한 행실을 세상에 보일 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보통 변화를 성격의 변화, 나쁜 습관의 변화로 얘기해요.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참 변하기가 힘들어요. 성격과 나쁜 습관이 변하려면, 먼저 내 인생의 목적이 바뀌어야 해요. 인생의 목적이 바뀔 때 같이 바뀌게 돼요.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인생의 목적으로 바뀌면서 성격과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되는 거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우리의 목적이 바뀜으로써 이루어지는 거예요. “내가 잘 먹고 잘 살아야지” 하는 나만을 위한 인생의 목적에서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적”으로 바뀔 때 모든 것이 함께 바뀌는 것을 보게 돼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도 바울은 굉장히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센 사람이고 과격한 사람이었죠.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복음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모습을 보여줘요. 오늘 설교 본문이 우리가 사도행전 22장을 읽었지만, 우리 자녀들은 21장과 22장을 읽었거든요. 그래서 21장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변화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는가를 설명해 드릴게요.

21장에 가면 사도 바울이 드디어 20년 만에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요. 예루살렘에서 자란 사람이에요. 한 번 상상해 보세요. 20년 만에 예루살렘에 가니까 얼마나 기대가 될까요? 거기다가 교인들을 만나니까 더 큰 기대가 될 거예요. 왜냐하면 20년 동안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수많은 일을 했거든요. 가서 선교 보고할 것도 정말 많을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기대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을까요? 처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선교 보고할 때 막 기쁘게 받아줬어요. 17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뻐 영접하고”, 18절에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 갔고 장로들도 다 있었어요. 장로님들과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제일 높은 분이거든요. 그들과 무난하게 만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행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까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그런데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바울에게 말하길,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와 같이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이다. 그런데 이들이 다 율법의 열성을 가진 자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미 오기 전에 사도 바울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져 있었어요. 21절에 보니까 “내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나 있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요. 모세를 배반하고, 유대인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유대 전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거예요. 사실인가요? 아니에요. 성경을 대충 보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라고 가르친 적도 없고,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친 적도 없어요. 오히려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으라고 얘기했어요. “네가 이방인 목회를 제대로 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죠.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도 없어요. 이방인들에게는 할례를 받지 말라고 한 것은 맞아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문화를 따라 살라고 하지 않은 것도 맞아요. 하지만 이는 오해였고 잘못된 소문이었어요. 한 명의 증인도 없이 그런 소문이 퍼졌고, 이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어요.

이 소문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장로님들과 야고보가 사도 바울에게 한 가지 요구를 했어요. 23절에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라.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대어 머리를 깎게 하라.” 서원한 네 명이 결례를 행할 때 필요한 비용까지도 사도 바울이 내라는 거예요. 민수기 6장 13절에 따르면 나실인의 서원한 자는 결례를 행할 때 비용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는 작은 돈이 아니었어요. 사도 바울에게 그 비용을 내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돈이 있었지만, 만약 예전의 사도 바울이었다면 “내가 왜 해야 해? 나는 결백해. 하나님이 다 아시고 내가 알아.”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사도 바울은 변했어요. 26절에 바울은 그 사람들이 말한 대로 사람들을 데리고 결례를 행했어요. 사도 바울은 자존심과 고집을 버렸어요. 어떻게 사도 바울이 할 수 있었을까요?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과 같이 된 이유는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된 이유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었어요. 유대인들도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고집과 자존심, 자기 생각을 모두 버렸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줬어요.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물론 21장을 자세히 보면,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잡혀가요. 오해가 풀려야 했는데, 사도 바울이 할 만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가 풀리지 않았어요. 이제 결례를 행했으니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을 테죠. 그런데 길거리에 나왔을 때 사도 바울이 누구를 만나냐면, 이방인과 길거리를 지나간 거예요. 사도행전 21장 29절을 보세요.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게 아니에요. 결례 행할 때 길거리에서 시내에서 만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 때문에 온 예루살렘이 들고 일어나서 사도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해서, 사도 바울을 잡아서 채찍질하고, 결국에는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로 끌려가게 되었어요.

참 안타깝죠. 오해라는 게요, 안타까운 거예요. 사람의 말은 더 커져요.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느 한국 교회에서 야외 예배를 갔어요. 어느 집사님과 목사님 아들이 고기를 굽고 있었어요. 그런데 항상 고기 굽을 때 교회에서는 라이터가 없어서 불을 못 붙이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집사님도 고기 담당하면서 불이 없는 거예요. 그때 목사님 아들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면서 “여기 있어요” 하고 불을 붙인 거예요. 그리고 고기를 잘 굽고, 예배를 잘 드리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집사님이 자기 아내한테 이렇게 얘기했어요. “여보, 우리 목사님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아.”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어떡하지? 그랬더니 아내가 구역장한테 얘기를 한 거예요. “목사님 아들이 담배를 핀대요.” 그런데 이 소문이 어떻게 퍼졌냐면, “목사님 아들이 마리화나를 핀대요.”라고 소문이 난 거예요. 그 소문을 장로님이 들으시고, “안 되겠다, 안 되겠다.” 해서 당회를 열어서 그 아들을 불렀어요. “마리화나를 핀다는데 목사님 아들이 마리화나를 펴서 되겠느냐.”라고 한 거예요. 목사님 아들이 너무 화가 난 거예요. 자기는 단지 고기를 구울 때마다 불이 없어서 라이터를 준비해 간 것뿐인데, 이렇게 오해하는 게 너무 화가 나서 그 당회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죽어 버렸어요. 그래서 목사님 아들은 그 상처 때문에 교회를 사임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여러분, 오해라는 게 이렇게 무서워요. 사도 바울도 오해로 인해 채찍질을 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 믿기 전의 모습, 예수 믿은 후의 모습까지 보여주었지만, 전도하는 데 아무 도움되지 않았잖아요.”라고 저한테 따질 수 있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그 모습을 가지고 20년이라는 3차 전도 여행을 통해 수많은 이방인의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야기를 전할 때 다 들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은 우리 할 일이라는 거죠.

이 말씀의 결론을 내리죠.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나의 이야기가 있기를 원해요. 나의 간증이 있기를 원해요. 예수 믿기 전에 나의 모습,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은 나의 모습,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내 죄 때문에 얼마나 피해를 줬는가, 그것에 대한 회개의 모습이 우리 이야기 속에 있기를 원해요. 내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을 우리의 이야기 속에 담기를 원해요.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바로 이 이야기, 나의 간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 주변에 있는 나의 가족들, 나의 자녀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계기가 되는 나의 이야기가 준비되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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