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6장 30절입니다. 함께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하거늘.”

우리가 보통 전도할 때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을 보게 되죠.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전도할 때는 노방 전도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기도 하고, 굉장히 귀한 사역입니다. 사역을 통해 성경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를 믿는 사례와 간증들이 종종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어떤 사람과 일정 기간을 함께 보내면서 전도할 때는 방법이 다릅니다. 특히 그런 상황 속에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자격을 얻은 사람이 말을 하면 듣게 됩니다. 그런데 자격 없는 사람이 말을 하면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네가 뭔데?”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자격 없는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말을 전하려고 할 때, 특히 복음을 전할 때 자격을 얻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케이스를 통해 이것을 보게 되는데요. 사도 바울이 그 사람한테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30절에 간수가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이는 사도 바울이 말할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굉장히 전도 많이 하시는 분으로 유명한 분이 계신데,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던 최권능 목사님이 있잖아요. 많은 분들이 그분이 그렇게 외쳤기 때문에 복음이 증거됐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분은 삶을 통해서 그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분은 원래 깡패였는데 삶이 변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을 깡패로 알았는데, 변한 삶을 보이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니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그 삶의 변화를 통해 그 말에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전도를 할 때 자격을 얻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격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케이스를 보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어떻게 자격을 얻을 수 있나’입니다.

첫째로,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운 중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것도 정말 억울하게 갇힌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게 아니라 어떤 귀신 들린 여자를 고쳐준 것입니다. 문제는 그 귀신 들린 여자를 데리고 돈벌이를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귀신 들린 여자를 통해 점을 치던가 해서 돈을 벌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나가버리니 돈을 못 벌잖아요. 그래서 화가 나서 사도 바울과 실라를 당국에 고발해버렸습니다. 그들은 이 여자를 고쳐주고 오히려 감옥에 간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간 것만이 아니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할까요? 좋은 일 하고 감옥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억울할까요? 그런데 감옥에 갇힌 이들의 행동이 남들과 달랐습니다. 이들은 감옥에 갇혀서 뭘 했느냐? 25절에 보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구절을 보니 찬송하는데 죄수들이 다 들었다고 얘기합니다. 그 당시에 찬송을 듣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저 사람들이 미쳤구나. 저렇게 두드려 맞더니 결국 실성한 거 아니야?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어?” 라고 할 수밖에 없죠. 솔직히 이 모습만으로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이 모습만으로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자격을 얻게 되기 위해서는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그들의 감사 위에 하나님의 역사심이 덧붙여질 때 그 역사심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그들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찬양 뒤에, 이들의 감사 뒤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역사일까요? 26절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이 메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혼비백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감옥을 지키던 간수였습니다. 27절에 보니 간수가 자다가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누가 감옥에서 도망가면 간수가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통당하면서 죽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가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울이 소리를 지릅니다. 28절에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내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도망가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성도가 어려움 속에서도, 고난 중에서도,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위에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간수가 처음에 사도 바울을 봤을 때는 패배한 사람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괜히 남 고쳐준다고 했다가 얻어터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간수 눈에는 실속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 믿으라”고 하면 간수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친 사람처럼 찬양을 하고 난리입니다. 간수 눈에는 미친 인간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옥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역사심을 바라봤을 때 그 모든 상황이 뒤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실속 없고 패배자였던 그 사람이 이제는 존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바라볼 때 억울한 사람, 패배자, 실패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역전시키셔서 오히려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존대받는 자리에 옮겨질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이 아까 읽었던 25절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는 그것이 역사를 바꾸게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들, 어려움 속에서 감사는 그 사건의 끝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 감사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입니다. 감사는 끝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이 감사가 시작으로 하나님 역사심이 임하고 사람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억울한 일이 있으십니까? 힘드십니까? 주님께 맡기고 전심으로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그 다음에 절차는 하나님의 역사심이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왜 하나님이 역사하실까요? 믿지 않는 자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참 대조가 되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혀서 찬양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감옥 밖에 있는데도 두려워서 자결하려고 합니다. 두 모습이 비교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감사의 차이입니다. 세상에서 바깥에 있으면서도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은 오히려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찾아와서 묻습니다. 30절에 간수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말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 이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몰랐을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은 알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대답해줍니다. 31절에 “주의 예수를 믿으라.” 어떻게 보면 뻔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보통 상황에서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그다지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주의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덧붙여 아주 강력한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장로교는 침례교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주는 이유입니다. 장로교는 유아세례를 뭘 믿고 주느냐 하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깐난아기에게 왜 구원의 징표인 세례를 줄까요? 그 이유는 부모가 믿기 때문입니다. 이 부모가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이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나와 내 집이 구원을 얻는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결국 33절에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바울과 실라의 매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 온 가족이 다 그를 통해 세례를 받습니다.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크게 기뻐합니다. 온 가족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돈이 생겼거나 무엇이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기쁨입니다. 온 가족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감사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감사해야 되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할 것이 없을까요?

어느 인도의 시골 교회에서 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한 가난한 여인이 자신에게도 힘든 많은 양의 곡식을 감사 예물로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때 목사님이 그 여인에게 물어보았어요.

“무슨 특별한 감사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러자 여인이 대답했어요.

“사실은 제 10살 된 아들이 있었어요. 지난해 그 애가 병이 났을 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이가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면 하나님께 많은 예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어요.”

목사님이 그 말을 듣고 물었어요.

“그러면 이제 다 나았나 보네요.”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어요.

“아니에요. 1년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놀라서 다시 말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약속을 무효로 하셔도 되는데요.”

그러자 여인이 대답했어요.

“아니에요. 이제야말로 주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 아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셨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 품에 있잖아요. 그래서 더 감사하죠.”

바로 거기에 감사의 제목이 있는 거예요. 교부 시대에 탁월한 설교자였던 크리소스톰도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당해 감옥에 갇혔어요.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감옥에서 이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저를 여기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어요. 이제 사형 교수형으로 죽게 되었어요. 그때 또 그는 이렇게 기도했어요.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하는데 저 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하게 하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교수형에 처해지기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갔어요. 그는 평온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죽기 직전에 갑자기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어요. 사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이었어요. 그 명령을 들은 크리소스톰은 다시 주님 앞에 기도했어요.

“주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저에게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저를 살려주셨군요. 평생 주님께 충성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그는 모든 것에 감사하였어요. 어떻게 이렇게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특권 때문이에요. 모든 믿는 사람은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에요. 바로 우리에게는 그 축복이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렇게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 역사를 더하셔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세요. 그런 자격이 부여됨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권세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어떤 권세냐면 첫째로는 사랑의 권세가 있어야 자격이 부여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도망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도망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알았어요. 자신이 도망가면 그 간수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에요.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면 왼수였거든요. 자기를 못 도망가게 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 간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생명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행동을 보면 알아요. 27절에 보면 간수가 자다가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거든요.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합니다.

“내 몸을 상하지 말아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이 모습을 보면 사도 바울은 다급했어요. 혹시라도 이 사람이 잘못될까 봐, 이 사람이 생명을 해할까 봐, 사도 바울은 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바로 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그걸 느낀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사도 바울을 이렇게 좋게 얘기하면 누가 나쁘게 보이는지 아세요? 성경에서 누가 나쁘게 보일까요? 여러분은 딴 사람이 생각 안 나세요? 저는 성격이 좀 그래서 그런지, 그럼 베드로는 나쁜 놈이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왜냐하면 베드로도 옥에 갇혔었잖아요. 그래서 옥에서 풀려났잖아요. 베드로 때문에 옥에서 베드로를 지키던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실제로 성경이 다 죽였다고 얘기해요. 다 죽였어요. 베드로가 뭐 했기 때문에 도망 나왔기 때문에 어떻게 베드로는 이럴 수 있어요? 베드로는 나쁜 사람일까요?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 탓은 아니에요. 사도행전 12장 7절에 보면 나옵니다. 호련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진지라. 지금 비몽사몽간에 벌어진 일이에요.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때 천사가 하는 것이 지금 베드로는 생시인지 꿈인지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환상을 보는가 하면서 베드로는 천사를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의 의지가 아니라 천사의 이끌림을 받는 것이었어요. 배드로는 환상을 본다고 생각하고 천사를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10절에 보니까 첫째,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면 천사가 그를 떠나더라. 이때야 베드로가 정신이 든 거예요. 환상인 줄 알고 비몽사몽간에 탈출한 거예요. 그래서 이르되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솔직히 베드로도 감옥이 열려도 안 도망갈 수도 있었어요. 그들의 영혼을 생각해서. 그렇죠? 그런데 베드로는 알고 저지른 일이 아니에요. 저질렀다는 말은 좀 이상하지만, 하여튼. 그럼 또 이렇게 따져 물을 수도 있어요. 그럼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하신 거네, 천사가 너무한 거네. 이렇게 따지자면 할 수 있지만 그래서 영혼 구원은 아무나 내가 원한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구원받은 우리는 그래서 더 감사해야 돼요. 구원받은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중요한 것은 우리 할 일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을 보임으로 그 권세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나오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두 번째는 영적인 권세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솔직히 이건 내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이 영적인 권세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어도 인정하게 돼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해요. 그래서 영적인 권세를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바라기는 설교 듣는 모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적인 권세를 부여하시길 원해요.

오늘 말씀해 보면 29절에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요. 도망간 줄 알았는데 안 도망간 이들을 보면서, 그러면서 묻죠. “선생님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의 의미는 이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물으면 구원받는 법을 정확히 알려줄 것이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이 사람의 영적인 권세를 인정하는 거예요. 바로 그 모습.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권세를 주시길 원해요.

제가 예전에도 설교한 적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오래전 일이지만 감명을 받아서 잊혀지지 않는 스토리인데, 어떤 부흥사가 교도소에 전도를 하러 갔어요. 많은 죄수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해야 하는데 이미 웅성웅성거리고 있었어요. 죄수들이 “저 사람 또 와서 얘기하겠구만.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이미 뻔한 얘기 또 할 텐데 우리 들어서 뭐해” 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했어요. 그러니까 이 목사님이 설교를 해야 하는데 힘이 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 성령님이 찬양으로 시작하라는 마음을 주셨대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찬양을 시작했어요. 그 찬양의 제목이 “His Eye Is on the Sparrow”였어요. 찬양의 가사 내용도 은혜로워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된다면, 더 귀한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겠느냐,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봐 주신다는 그런 찬송을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열린 창문으로 참새 한 마리가 들어와서 쫙 이렇게 돌았어요. 그리고 찬송이 끝나자 참새가 날아가버렸어요.

그래서 찬송 후에 목사님이 강대상에 서서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예수님을 믿고 싶은 분 있으세요?” 그러자 모두 일어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눈물까지 흘리더라고요. 이것이 바로 영적인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역락의 성도들에게 이 권세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저 사람과 함께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드러내며 사는 영적인 권세를 소유한 바로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권세입니다. 오늘 말씀 22절에 보면 우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을 하니까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치라고 합니다. 23절에는 많이 치는 거예요. 그냥 대충 맞은 게 아니에요. 심하게 두드려 맞은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고난의 흔적이 있었어요.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감옥에 갇혔어요. 그런데 이 고난의 흔적은 어떠한 말보다 설득력이 있어요. 여러분, 부자가 가난한 사람 전도하기 엄청 힘들어요. 가난한 사람이 같은 어려움을 걷고 있는 사람을 전도하기 쉬워요.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전도하기 힘들어요. 아픈 사람이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전도하기가 쉬워요. 그렇기 때문에 고난의 흔적은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입니다.

여러분, 왜 도마가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구멍 난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여달라고 했을까요? 구멍 난 창 자국을 보여달라고 했을까요? 물론 도마의 의심을 반영하는 것도 맞아요.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묻어있어요. 그것은 바로 고난의 흔적을 보기를 원하는 거예요. 나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고난의 흔적을 바라볼 때 그것은 믿을 수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신뢰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고난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신뢰하기가 힘들어요. 그 사람의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너는 몰라, 네가 뭘 알아?” 이렇게 얘기해요. 고난의 흔적이 있는 사람의 아는 얘기에는 귀담아 듣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하신 거예요. 누가복음 9장 23절의 명령이 뭐예요? 또 우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얘기는 뭐예요? 항상 십자가를 지고 사는 그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살라는 거예요.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살 때 우리가 전하는 말을 사람들이 듣게 돼요. 여러분, 우리는 내가 잘나갈 때, 내가 편할 때 세상 사람들한테 인정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고난 속에 있을 때, 그 고난 속에서 내가 내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고 싶어지게 돼요. 그래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믿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목사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었잖아요. 교통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양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잖아요. 송명희 시인 같은 경우에도 그렇죠? 뇌성마비로 나중에는 전신마비까지 됐는데 그 사람이 “나 가진 재물 없으나” 하면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얘기할 때 사람들이 “맞죠, 우리 하나님 공평하신 하나님이야” 하고 인정하게 돼요. 그런데 부자가 잘나가는 사람이 “우리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야” 하면 누가 듣겠어요? 그 고난의 흔적을 지녔기 때문에 그것이 믿어지게 되는 거예요. 은혜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예요. 고난의 흔적을 지닌 그 사람이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더해짐을 통해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라고 인정하게 되는 거예요. 저 사람의 말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묻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고난의 흔적이 바로 권세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어떤 고난 속에 있으세요?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고난의 권세로 역전시켜주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이해가 되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로 전도하는 도구가 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의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요,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길 원해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자격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그 영혼을 사랑함으로 사랑의 권세를 가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나타내므로 영적인 권세가 더해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고난 앞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그것이 고난의 권세가 되어 우리의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영혼 구원의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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